유명론(Nominalism)
그리고 실재론(Realism)
사회학에서도 자주 쓰이는 용어이지만 유명론 혹은 명목론(Nominalism)과 실재론(Realism)은 중세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꽃을 예로 들면, 꽃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실재론이다. 이와 달리 유명론자들은 꽃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화꽃이나 장미꽃 같은 꽃의 종류들이 있고 단지 그러한 것들을 집합적으로 부르는 개념이 꽃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꽃들만이 실재하는 것이지 꽃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근대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중세의 유명론 논쟁을 통해서 개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고 종교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학의 주제 중 하나인 교회론을 예로 들면 가톨릭은 인간이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었다. 교회는 실재(實在)하며 구원은 교회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명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단이 아닌 개개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토대로 한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가톨릭) 교회와 이를 대표하는 주교가 아닌 개개인의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을 길이 열리게 된다. 이제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고대교회로부터 내려온 명제가 프로테스탄트(저항) 교회에 의해 부정되게 된다.
석사 과정까지는 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종교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이 오래된 논쟁인 유명론 논쟁을 새롭게 바라보는 중이다. 하나님이나 구원과 같은 절대진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라져 가는 것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걱정하곤 하는데, 사실 종교개혁 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진리라는 것이 이미 개인적 차원에서 다루어져 왔다. 방법론을 가르치던 네덜란드의 한 가톨릭 신학자는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광부처럼 땅을 파는 연구가 있을 수 있고 여행하듯 돌아다니면서 진리를 발견하는 연구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자신은 계속해서 땅을 파내려 가다 보면 진리가 발견될 거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완벽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다. 이전엔 그런 포스트 모던한 생각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틀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늘 파편화된 사실들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니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유는 세상이 연역적인 증명에 의해 기독교의 문제들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들, 각각의 신자들의 삶이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 혹은 기독교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실재론만을 주장하는 이들, 연역적인 진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교회가 진리를 소유했기 때문에 교회 혹은 교인의 도덕성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니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교회의 부패와 개인의 부조리를 간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면죄부(원래는 면벌부) 판매에 질려버려서 인간 선행의 의의를 극도로 약화시켰지만 주님은 마태복음을 통해 인간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강조하셨으니 각자의 삶을 통해, 각 교회의 깨끗함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파편화된 진리로서의 삶들을 보면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개독교를 다시 기독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