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카자흐스탄으로
9년 전
꿈꾸던
꿈같던 첫 이민 발걸음을 떼었다
아직 젊고 뜨거운 삽 십 대 초반.
열정과 패기로 겁 없이 도전한 사업에 무난히 성공할 거라 믿었으나
환율은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고
혼돈과 환란 가운데 잉태된 소중한 세 번째 생명은
차가운 겨울, 늦도록 가게를 돌보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오던 날
스스로 하늘길로 돌이켰다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크리스마스
그날이 더 아프고 눈물 났던 건
온 땅의 기대와 기쁨이 된 날 - 크리스마스
생명이 돌이킨 날 또한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한숨과 체념이 습관 될라
어금니 물고 다부지게 꼭 두 손을 꼭 쥐었지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매일매일 마주해야 하는 악몽의 현실은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고
연단과 연단을 거듭하면서
손은 더 거칠어지고 여리던 뼈는 더 단단해져 갔다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국경을 넘던 야간 버스.
역하고 쾌쾌한 냄새
싸구려 담배 아로마 절고 절은 버스 칸 유리창에 머리 기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깐의 쉼이 달콤했고
새벽 내쫓아오는 찬찬한 별빛과 달빛은 어찌나 야속한지...
나도 모르게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이 그토록 뜨거웠던 건
아마도 모진길 달리고 달려 낡을 대로 낡아 성한 곳 없는 버스가
마치 지금의 나인 듯 애처로운 버스가
한 겨울 황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동안
스스로조차 잘 가누지 못해 잠시 잠시 멈추어 가야 하고
구멍 숭숭 아린 상처의 자리, 바로 그 자리로 차디찬 바람이 스며들지만
제대로 된 온기를 조차 넉넉히 불어넣을 힘이 없어
얼어붙은 창가에 기대어 차갑게 빨개진 볼이 더 차가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모서리와 모든 절벽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어 아름답더니
오늘 마른 사막 그 한가운데 선 내게 오아시스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떠나야 했고 돌이키지 않으리라
아픔은 한 번으로 족하리니 결코 돌이키지 않으리라
그러나 어찌 알 수 있었을까?
2개 대륙을 돌고 돌아 다시 이곳을 오게 될 줄....
9년 후
그리고 4번째 이민.
오래전에 꿈꾸었던
아직 꿈이 온전히 익지 못한 그곳
삶의 모진 모서리와 모퉁이
그 애증의 교차로인 그곳으로 다시 몸을 실었다
그리고 돌이켜 보았다
다시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그간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하심으로
오직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사업과 직장생활, 이민생활에 성공하길 기도하였으나
왠지 자꾸만 벼랑 끝 그 끝없는 나락의 모서리로 인도하셨고
한 번의 아픔은 더 겪었지만
마침내 내가 알지 못했던 꿈에 없었던 꿈같이 행복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누리게 하시고 위안하셨다
돌고 돌아 가까스로 안착한
꿈에도 없던 새로운 정착지에서
반복되는, 몸과 마음을 피곤케 하는 적응의 과정이
생활고의 진통이 쉬이 지나갈 수 있길 기도하였으나
아주 답답하리 만큼 느릿느릿
모든 길과 모퉁이와 구석구석을 걷게 하심으로
수많은 날을 이야기하여도 모자랄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 주셨고
거듭되는 생경한, 전혀 다른 언어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언어의 능통을 구하였으나
말없이 눈빛으로 통하는 현지 친구들을 곁에 주심으로
구할 것은 능통한 언어가 아니라
오로지 사람을
말없이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더 넓고 깊은 마음 그릇을 구해야 함을 알게 하셨다.
간혹 또 거듭 넘어질 때마다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으나
허파를 찌르는 깊은 고독이 지독한 외로움으로 전이될 때마다
내 손 꼭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였으나
외려 자주 넘어지게 하심으로
또 실수와 실패로 주저앉게 하심으로
한 번
또 한 번 넘어지고 주저앉을 때마다
잘 넘어지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고
철석 주저앉아도
아직 딛고 일어설 바닥은 남아 있음을 알게 하셨다
더는 울일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나
자주 울게 하심으로
더 자주 울게 하심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은
눈물 없이는 참된 것
유리같이 투명한 본질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오늘 다시 이 자리.
첫 열정과 꿈이 남아 있는 자리
헛웃음이 많았던
미처 다 마치지 못한 그림이 남아있는 쓸쓸한 여백의 자리...
차마 오늘은 오늘을 알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내일엔
조금 더 훗 날엔
오늘을
진짜 오늘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
그때까지는 잠잠히 걸으리라
오늘이 참된 오늘이 되기까지
그러니
그때까지는 웃으며 걸으리라
모든 모서리와 모퉁이가
아름답게 추억될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