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서 오십사이
子曰,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자왈, 불왈여지하여지하자 오말여지하야이의
어찌할까?
지난 몇 달간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다.
어찌할까?
궁리에 더한 궁리.
다시 돌아온 타국, 이젠 익숙한 옛 사업지에서 새로이 시작한 사업들로 내 작은 머리는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현실의 한계는 꿈으로 이어졌고, 그 꿈들은 다시 현실로 하나씩 이루어져 갔다.
가끔은 그런 일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종종 풀리지 않는 숙제, 그 고민들을 생생한 꿈속에서 해답을 얻을 때가 있다.
그리고 곧 휘발될까 몸을 벌떡 일으켜 캄캄한 밤 날려 메모로 남겨둔다.
그 갈겨쓴 기억이 현실이 될 때 느껴지는 소소한 희열!
그것이 자기 사업을 일구어 가는 가장 큰 재미일 테다.
그 소소한, 스릴 넘치는 재미 가운데 두 달여 새 벌써 세 번째 가게가 열렸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공자) 이미 어찌할 수 없다."
어찌할까? 는 단순한 'How?'가 아닐 테다.
'How to'에서 'to be Good'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to be better'로.
더 나은 것을 위한 더 깊은 생각 - 어찌할까?
고귀한 성인들의 조언도 한결같다.
'성찰하고 숙고하라!'
'고민'않고 '숙고'하겠다.
고민이 많으면 병이 오지만, 숙고가 많으면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더해진다.
고민은 한자로 '고통, 괴로움'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자체로 유해한 스트레스다.
숙고는 다만 '깊게, 차근차근 헤아려 봄'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유익이다. 더 나아가 숙고는 '즐거움'이다.
고민과 숙고의 경계,
그 둘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날, 나는 애꿎은 나를 괴롭혔다.
끝없는 고민으로 스트레스가 겹겹이 쌓였고, 어리석은 독사처럼 스스로를 물어 맹독을 주입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그토록 빨리 '번-아웃'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만의 '숙고' - '사색四索'의 시간
첫 번째 색 - 그린 Green - 생생(生生), 숙고의 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생리적인 삶이 아닌, 실제적인 삶을 의미한다.
숙고는 마치 말라비틀어져가는 땅에 내리는 비와 같다.
숙고는 'Wilderness'를 'Green field'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요즘은 어떤 상황에서든 잠시 시간 내어 걷는다.
그리고 '치열한 Red'에서 다시 '나다운 Green'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숙고'나 '사색'이란 거창한 이름이 아더니라도 충분한 그런 시간을.
두 번째 색 - 블루 Blue - 안정 (安定), 숙고의 시간, 나는 '가장 안정'한 상태가 된다.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했다.
(안타깝게도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디찬 시대다.)
참된眞 숙고는 머리를 차게 한다.
형체도 없는 물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얼리는 것이다.
언젠가 바다가 언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파도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바다를 얼릴 수만(안정화) 있다면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의 실체를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한 때 내게 끝없이 몰아치던 그 파도가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발견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오늘도 진(Dark) 블루 바닷속을 탐험하듯 깊이, 더 깊이 사색으로 들어가 본다.
세 번째 색 - 레드 Red - 열정(熱情), 숙고의 산물 - 패션 Passion 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열정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뜨거움이 없는 마음으론 아무것도 데울 수 없다.
숙고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확신(Conviction)이다.
그 확신은 신념(Faith)을 낳는다.
다시 그 신념은 열정 (Passion)을 낳는다.
열정은 세상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준다.
사색의 힘은 결국 몸을 일으켜 뛰게 하는 에너지다.
가장 정적인 힘에서 가장 활동적인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은
오랫동안 감추어진 '그들만의 비밀'과 같다.
네 번째 색 - 앰버 Amber - 경계(警戒), 숙고는 성찰을, 성찰은 '경계의 신호'를 곧 잘 보낸다.
삼색 신호등의 묘미는 몇 초간의 앰버의 시간이다.
경계의 기로 ; 갈 것인가? 설 것인가?
어떻게 할까?
헬기 조종사였을 때 항공작전의 절정은 '결정의 순간'이었다.
'Go - No Go' 판단이라 했던 그 과정은
기상과 제반 상황을 고려한 '숙고'의 결정체였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Go'를 택했다.
한계치에 근사한 조건이지만
멈춤의 안전보단, 아슬아슬한 모험을 택했다.
절벽의 경계에서 경계의 신호를 무시하는 무모한 용기는
마흔 너머에는 '저지르지 못한 용기'가 무척 후회로 남을 탓이다.
마흔에서 오십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깎아지는 경계
그 아슬아슬한 사선의 아름다움일 테다.
마흔에서 오십 사이의 스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