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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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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토리 Mar 28. 2021

록의 역사 1화 - 척 베리부터 엘비스 프레슬리까지

척 베리, 리틀 리처드,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록이 등장하기 전, 백인과 흑인의 음악은 뚜렷하게 갈렸습니다. 백인은 컨트리 계열, 흑인은 블루스 계열이 주류였죠.


하지만 1950년대 들어 이 경계는 무너집니다. 당시 미국에는 새로운 문화적 욕구가 꿈틀거렸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고,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에너지를 분출할 만한 문화를 찾습니다. 프랭크 시나트라로 대변되는 점잖은 스탠더드 팝은 확실히 그들의 취향이 아니었죠. 이때 젊은 백인들이 주목해 차용한 것이 바로 흑인의 블루스 음악이었고, 반대로 흑인이 백인의 컨트리 장르를 도입하기도 하면서 장르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장르의 균열점에서 바로 록이라는 음악이 서서히 탄생하게 되죠. 그리고 이 시기에 유난히 춤을 잘 췄던 흑인 기타리스트가 한 명 등장합니다.


Chuck Berry

척 베리는 1955년 첫 싱글 Maybelline을 발표하며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매우 이례적인 성공이었죠. 성공의 이유는 Maybelline의 독특한 스타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곡은 백인들의 컨트리 풍을 가미한 빠른 템포의 블루스 곡이었기 때문에 백인의 감성에도 잘 맞아떨어졌죠. 게다가 Ducktail step(오리처럼 뒤로 엉덩이를 한껏 빼고 한쪽 발로 깡총거리는 몸짓)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직설적인 가사까지. 척 베리는 락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 내렸던 뮤지션이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락의 탄생에 열광했고, 특히 60년대 록 음악 후배들은 그를 우상처럼 숭배했습니다. 롤링 스톤즈는 아예 척 베리의 Come On이라는 곡으로 데뷔했고, 그를 향한 헌정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죠. 비틀즈 또한 무명시절에 제일 많이 카피했던 노래들이 척 베리의 노래였습니다. 이후 존 레논은 단 한 문장으로 이 거장이 누구인지 잘 요약하기도 하죠.

If you tried to give a rock&roll another name, you might call it ‘Chuck Berry'

한편 척 베리가 활약하던 시기, 척 베리만큼이나 역동적인 무대매너를 보여줬던 또 한 명의 뮤지션이 있었습니다.


Little Richard

리틀 리처드는 폭발적인 샤우트 창법과 격렬한 피아노 연주로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렸습니다. 성격 또한 괴팍했죠. 공연을 할 때 밴드 멤버들이 자신보다 튀는 옷을 못 입게 했습니다. 여담으로 리틀 리처드보다 요란하게 차려입어 밴드에서 해고된 기타리스트가 한 명 있었는데, 이때 해고된 단원이 바로 훗날 전설적인 기타리스트가 되는 지미 핸드릭스였습니다. 어쨌든 리틀 리처드처럼 당시 백인 컨트리 가수들도 블루스 스타일을 적극 차용해 로커빌리라는 장르를 탄생시켰고 로큰롤의 슈퍼스타가 등장하면서 이 로커빌리 장르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Elvis Presley

엘비스는 원래 트럭 운전수였습니다. 트레이드 마크인 독특한 머리 스타일도 당시 트럭 운전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죠. 비록 백인이었지만 흑인의 보컬 스타일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던 엘비스는 이 참신한 매력으로 데뷔 후 줄줄이 대박을 터뜨립니다. 1956년 Heartbreak Hotel은 싱글 발매 3개월 만에 차트 1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 Don’t Be Cruel, Hound Dog, Love Me Tender가 잇따라 히트하죠. 엘비스는 말 그대로 세상에 로큰롤의 탄생을 널리 선언한 뮤지션이었습니다. 훗날 롤링스톤지는 엘비스의 데뷔 싱글 That’s All Right을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로 규정했고, 빌보드지 또한 Heartbreak Hotel을 최초의 로큰롤 히트곡으로 공인했죠. 하지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엘비스는 1958년 갑자기 입대를 선택합니다. 슈퍼스타의 빈자리는 너무 커서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이 시기 엘비스에 버금가는 또 다른 로커빌리 가수가 한 명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Buddy Holly

버디 홀리는 엘비스 프레슬리 공연의 오프닝 밴드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57년 That’ll Be The Day Peggy Sue가 연이어 히트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죠. 때마침 엘비스도 입대했기 때문에 버디 홀리는 자신의 독무대를 이어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곡을 하지 않았던 엘비스와 달리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며 노래한 점, 오늘날의 밴드 멤버 편성을 최초로 확립했다는 점 때문에 엘비스보다 오히려 버디 홀리를 높이 평가했던 전문가나 후배 가수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버디 홀리의 전성기는 너무 짧았습니다. 1959년 2월 3일, 투어를 위해 이동 중이었던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고 버디 홀리는 22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버디 홀리의 죽음을 끝으로 로큰롤계는 한동안 침체기에 빠집니다. 당시를 대표하던 로큰롤 스타 척 베리나 제리 리 루이스가 불미스러운 개인사에 휘말려 대중과 멀어졌고, 리틀 리처드는 뜬금없이 은퇴를 선언하고 목사가 됩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갑자기 로큰롤 이전의 스탠더드 팝과 비슷한 스타일의 곡을 선보였고, 많은 로큰롤 팬들은 이에 실망합니다. 이제 록의 시대는 끝난 듯했고, 수많은 다른 음악 장르와 마찬가지로 록 또한 한때의 유행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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