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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Nov 12. 2016

충주, 충주 고구려비를 보다.

아~~ 고구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충주 고구려비


고구려의 땅따먹기(영토 확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은 당연 광개토대왕이다. 하지만 장수왕 또한 영토 확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이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은 주로 북쪽을 향했다. 내물왕(내물 마립간)의 요청으로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을 제외하고는 영토 확장이 북쪽을 향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과정을 증명해 주는 것이 광개토대왕릉비다.
장수왕은 이와는 반대로 주로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에 힘썼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함을 천명한 것이다. 이후 한강을 놓고 50년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결과는 고구려의 승리!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쫓겨(천도) 난다. 그러나 남진정책의 결과 국경선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 결과 국경선이 서쪽으로 아산만에서 동쪽으로 영일만에 이르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삼족오 조형물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안에 산다고 하는 전설의 새로서 고구려 고분 벽화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독창적인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조형물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그때는 전시관 안이 아니라 비각에 충주 고구려비가 놓여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때가 더 좋았다. 보호할 목적이라면 비각을 크게 지어 보호할 수도 있을 텐데. 짧은 생각일 수 있으나 어쨌든 아쉽다.  


개마무사 조형물


전시관 곳곳에 충주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안내글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개마무사와 광개토대왕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을 빼놓는 것은 어려운 모양이다.


장군총 모형도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남아있는 고구려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이라고 한다.


충주 고구려비


광개토대왕릉비를 생각하고 간 아들이 실망스러워했다. 크기로 비교하면 광개토대왕릉비와 견줄 수 없다. 하지만 가치만큼은 크다.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당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삼국의 관계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주 고구려비의 가치


충주 고구려비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고구려의 영역이 남한강 유역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해독 가능한 비문을 통해서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고 신라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점은 고구려가 신라보다 상위의 입장에서 신라를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당시(5세기)의 삼국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 고구려의 관등 조직, 인명 표기 등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에서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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