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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Nov 10. 2016

세계유산 창덕궁에 가다.

낙선재!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이야기


헌종은 조선의 24대 왕이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할아버지 순조의 보호 속에서 성장한다. 무기력했던 할아버지 순조는 손자를 오랜 기간 지켜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때 헌종의 나이가 8세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 8세의 헌종이 즉위하게 되고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헌종은 열 살 때 효원왕후를 왕비를 맞으나 후사 없이 일찍 죽는다. 계비로 효정왕후 홍씨를 맞이하나 헌종은 간택에서 떨어진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경빈 김씨다.
왕비의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절차를 밟는다. 마지막 삼간택에 세 명의 후보가 오르는데 최종 선택된 이가 왕비가 되고, 나머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궁궐 안에 궁인으로 남아야 했다.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잊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조선 왕실은 후사를 걱정할 정도로 손이 귀한 상태였고, 헌종의 마음을 헤아려 간택에서 떨어진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게 된다.
헌종이 사랑하는 여인 경빈 김씨를 곁에 두고 후사를 이을 목적으로 만든 영역이 바로 낙선재 영역이다. 
낙선재 영역은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세 개의 영역으로 되어있다. 낙선재는 헌종의 사랑채 역할을 했고, 석복헌은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낙선재 전경
장락문


낙선재의 문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전해진다.


장락문


장락문을 통해서 보이는 곳은 낙선재의 후원 영역이다. 화계는 관람할 수 있지만, 다른 전각들은 낙선재를 통해 들어갈 수 없다.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 역할을 했다. 


낙선재


낙선재가 창덕궁의 다른 건물과 다른 것은 단청이 없는 건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건물에 비해 소박한 것은 맞으나 자세히 살피면 단청만 없지 여간 공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기둥마다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낙선재


낙선재를 대표하는 누마루로 누마루 밑에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 부분의 특이한 무늬는 빙렬 무늬하고 부른다. 누마루가 날아갈 것 같다. 실제로 누마루 기둥에 구름 모양을 새겨놓았다. 하늘 위의 세계를 표현한 듯하다.


석복헌

  

석복헌(錫福軒)은 헌종의 사랑!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건물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오랜 사랑을 원했지만 세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빈 김씨를 맞이하고 2년 후 헌종은 죽음을 맞는다.

창경궁에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는 집복헌(集福軒)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은 정조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와의 사랑이 꽃 핀 장소로 순조가 태어났다. 후사를 이을 왕손(훗날 순조)을 낳은 수빈 박씨를 아꼈던 정조는 집복헌 옆 영춘헌(迎春軒)을 서재 겸 집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헌종도 정조와 같은 마음으로 낙선재와 석복헌을 지었을 것이다.  


수강재

  

수강재(壽康齋)! 목숨 수(壽)와 편안할 강(康)이 들어간 편액을 단 건물 대부분은 나이 많은 궁궐의 여인을 위한 집이다. 편안하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 수강재는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행했던 순원왕후(순조비, 헌종의 할머니)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헌종이 사랑한 여인 경빈 김씨를 할머니가 지켜주기를 원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영화로 제작된 덕혜옹주(고종의 딸)가 일본에서 돌아와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낙선재 내부

낙선재 마루


궁궐의 건물보다는 사대부 집을 닮았다.  단청이 없이도 화려하다. 기둥에 내려진 주련과 문양이 아름답다. 분합문을 들어 올린 것도 멋스럽다. 


낙선재 내부(후원에서 정면)

 

일명 포토 존이다. 후원 쪽에서 내부를 거쳐 인물 사진을 많이 찍는다. 


낙선재 후원 입구

낙선재 후원

낙선재 후원

낙선재 후원

   

화려하지 않지만 공들여 건물을 올리고,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훌륭한 후원이 있었지만 낙선재 내에 또 다른 화계를 마련했다. 후사를 이을 왕손을 바라며 행한 일이겠다. 하지만 후사를 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후 낙선재는 헌종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용되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여인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이 되었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고종의 둘째 아들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일본인), 덕혜옹주 등 왕실(황실) 가족들이 이곳에 머물다 죽음을 맞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원했건만 곡소리가 울리다니......




영조의 셀프 간택이야기


21대 왕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랜 장수를 누린 왕이다.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 서씨가 후사 없이 죽었다. 66세였다. 2년을 정비 없이 보낸 영조는 66세에 계비를 맞게 되는데 이가 정순왕후 김씨다. 15세였다.
왕비의 간택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영조가 장수하는 동안 어른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간택을 스스로 하게 되고 계비로 선택된 왕비가 정순왕후다. 

간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초간택, 재간택이 끝나고 마지막 삼간택은 영조가 친히 면접을 진행한다.
영조는 세 후보를 불러 후보들의 아버지 이름이 놓인 방석에 앉게 했다. 둘은 방석에 냉큼 앉았지만, 정순왕후는 방석 옆에 앉았다. 이유를 물으니 "아비의 이름 위에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단다.
영조는 면접을 이어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둘은 산과 물이라고 대답했다.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인심은 결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영조의 면접은 계속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 물으니 둘은 모란과 매화라고 대답했다. 정순왕후는 "목화꽃-다른 꽃은 일시적으로 좋으나 목화는 천하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라고 대답했다. 
영조의 마지막 시험은 밖에서 이루어진다.(창경궁 통명전) "전각의 서까래가 몇 개인가 세어보거라." 둘은 목을 들어 열심히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다가 다시 세기를 반복할 때, 정순왕후는 처마 밑에 생긴 낙숫물 자국을 하나씩 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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