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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Nov 30. 2016

영월, 장릉에 가다.

단종의 능, 장릉!




버드나무 이야기


수양대군(세조)과 관련된 버드나무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기생집에 찾아갔던 수양대군이 기생의 남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치다 간신히 고목나무속으로 숨는다. 수양을 찾던 남자가 사라지고 한무리의 사람들이 볼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인즉 "오늘은 버드나무가 왕을 보호하는 날일세" 였다. 날이 밝고 자신이 숨었던 나무가 오래된 버드나무의 썩은 부위였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왕이 된 수양은 옛일을 생각해 그 말을 했던 사람을 찾는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죽었지만 그 자손에 의해 그가 살아생전에 서운관(별자리 관측)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또한 수양버들은 수양대군의 한결같이 않았던 마음에 비유하는 이들이 많다. 
단종의 능이 위치한 곳은 영월이고, 단종의 능은 장릉(莊陵)이다. 산속임에도 불구하고 버드나무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수양버들인지 능수버들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버드나무가 많다는 점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숙부인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죽임을 당한 단종(노산군)은 죽어서도 수양대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버드나무

  

수양버들과 능수버들은 우리나라 전국토에 분포해 자란다. 차이점은 늘어짐의 차이인데 많이 늘어지는 것이 수양버들(바람에 잘 흔들린다), 덜 늘어지는 것이 능수버들이다. 비교 대상이 없어 능수인지 수양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능수버들이라고 우기고 싶었던 나무
단종 역사관


단종의 세자 즉위부터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다. 


재실

박충원 낙촌비각


중종 때 영월 군수였던 박충원이 노산군 묘를 관리했음을 전해주는 비각이다.


매표소 가까이에서 장릉에 오르는 길

장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자각과 부속 건물

장릉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조작 냄새가 아주 진한 몇 건의 역모 사건 이후 영월 청령포에 위리안치 된다. 그 후 금성대군 이유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장인이었던 송현수와 금성대군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야사에는 궁궐에서 사약을 보내오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고는 창밖에서 줄을 당기게 했다는 것이다. 후하게 장사지내지도 않았고 시신도 방치되었는데 고을 향리인 엄흥도가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중종 때 묘를 찾아내 노산군 묘로 관리되다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숙종 때의 일이다. 

장릉


양쪽 곡장이 끝나는 부분에 세워진 길쭉한 석물이 혼유석이다. 혼유석에는 영혼이 드나드는 문으로 여기는 세호(작은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 데 조선의 왕릉 중 세호가 새겨지지 않은 유일한 혼유석이 서 있다.


장릉에서 내려 본 정자각
장판옥


이 건물은 정조 때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배식단
배식단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주변


홍살문은 대체로 정자각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데 이곳은 'ㄱ'자로 꺽여 있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라고 한다. 신도와 어도로 구분되고 일직선이 일반적이다. 준비된 왕의 능이 아니라서 이런 형태가 된 듯하다.


참도(신도와 어도)

참도(신도와 어도)

수복방, 전사청
정자각


400년 가까운 수령의 느릅나무가 정자각 정면에 서 있다. 


영천

영천


영천(靈泉)은 우물이다. 정조 때 어명을 받아 영월 부사가 수축하여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한식 때가 되면 물이 많이 솟았다고 전해진다.


정자각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丁'자 모양이라서 정자각이다.


예감(망료위)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던 곳이다.


단종의 비와 비각


영조 때 세워졌다. 단종의 생애를 적고 있다.


엄흥도 정여각


단종이 죽고 나서 시신은 버려진 상태였다. 역모와 관련된 자의 시신을 거둘 경우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았음에도 엄흥도는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였다. 중종 때 단종의 무덤을 찾는 과정에서 엄흥도의 이야기가 밝혀지게 된다.


재실

들어갈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나올 때 보인다. 한복대여......


나오는 길에 재실을 다시 들렸다.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복을 대여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즘 서울의 궁궐이나 전주의 한옥마을을 방문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행인 듯하다. 하지만 이는 아닌 듯하다.






단종과 세조의 뒷 이야기


단종의 죽음은 많은 뒷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실과는 다르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세조에 대한 저주를 해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가 죽었다(단종 보다 한 달 일찍 죽음)는 이야기. 세조의 꿈에 나타난 현덕왕후가 침을 뱉은 이후 세조의 몸에 종기가 났다는 이야기. 단종이 죽어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지만 새겨볼 만한 역사적 사실도 있다. 세조의 자식 농사다. 앞서 이야기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차남인 예종은 단명한다. 의경세자와 예종 둘 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아버지 세조가 흘린 피에 대한 죗값을 그 아들들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는 친일에 대한 청산 없이 친일파의 후손들이 득세하며 살고 있다. 반성도 없다. 자신들의 논리를 힘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에게 악담을 한마디 하고 싶다. 당신들이 아니라며 당신들의 후대에서 꼭 받을 거야. 죗값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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