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서민규 Mar 11. 2019

커리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인생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동안에.”
- - 세네카



나는 구본형처럼 되고 싶었다.

약 20년 전, ‘변화경영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명함을 내민 구본형 소장에겐 수식어가 많다. 많은데다가 아직도 유효하기까지 하다. 20년 간, 글로벌 기업에서 실무 역량을 갖추고 퇴사하면서 자신의 업을 새롭게 정의한 사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해낸 사람. ‘1인 기업가’의 길을 처음으로 열었다고 평가받는 사람. 그리고, 사람을 남긴 사람. 언제 봐도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내린 해석은 매력적이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멋지기만 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내 주위에도 구본형 소장을 ‘구 사부’로 기억하며,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소중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일관된 주제는 ‘바꾼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혁명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에 대한 서구의 우월적 지위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혁명이라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 직장에서 ‘변화와 조직의 개혁’이라는 주제를 벌써 13년 동안 끌어안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변화 관리 전문가’라는 틀에 넣으려고 한다. 12년째 되는 해에 변화와 개혁을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 -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전공과 회사의 직무를 굵직하게 연결시켜서 스스로를 해석한 사람. 그리고 그걸 업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커리어로 만들어 버린 사람. 그의 책 속에 담긴 말들은 아직도 설득력있게 살아서 다가온다.


안타깝게도 나는 구본형 소장처럼 될 수 없었다.

다른 점은 차치하고, 글로벌 기업에서 20년의 시간을 보낸 점이 그렇다. 그 시간을 거쳤어야만 획득되는 ‘커리어에 대한 해석’을 나는 가질 수 없었다. 글로벌 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직장에서 20년을 보내는 일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 구본형 소장은 대단했지만, 그 시대에 맞는 그런 종류의 탁월함은 이제 재현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구본형 소장처럼 되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투자는 미래 인생의 깊이를 결정한다. 결정하기에 따라 행복하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쫓기고 쫓겨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수도 있다. 오늘을 넘기고 오늘을 사는 것만이 중요해질 때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 -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그의 책을 처음 접한 2017년, 여전히 내게는 구본형 소장처럼 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커리어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결별할만한 익숙한 것이 내게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투자를 해야 했다. 나는 시작해야 했다.



커리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구본형으로 대표되는 커리어는 다신 오지 않는다.

우리가 준비될 때까지 커리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퇴사학교 2년 6개월 간 만난 다양한 연차의 직장인들을 만나고 느낀 것을 하나만 꼽자면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겠다. 이미 20년 이상의 커리어를 만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그 전환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는 20년차 ___전문가입니다. 이제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___를 시작하려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다. 또, 시장에서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드문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전문성을 영속해가는데 시장의 위협도 적은 상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전문성을 20년이나 유지했다면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모든 사람이 이런 유리한 상황에 있지 않다. 이미 쥐고있는 것을 더 꽉 쥔채로 동시에 다른 전환을 꾀어야 하는 상황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유는 다양하다. 남들이 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다음을 준비한다. [철밥통 깨고 나오는 청춘, 그들은 왜…]  모두가 너무 많이 학습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더는 이 이유들를 열거할 필요는 못 느낀다.


커리어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는 다른 구절을 만났다.


“자신의 인생에 주제를 갖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이다.” - -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커리어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 콘텐츠를 먼저 만들기로 했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를 읽은 2017년 12월 말, 2년 정도를 두고 무언가에 몰두해보고 싶었다. 커리어 기준으로 본다면, 내세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나는 자랑으로 여기는 커리어지만, 비영리조직과 광고기획사에서 일했던 것에 대해 세상은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퇴사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3-5년차 커리어를 갖췄다거나, 혹은 대기업에 취업해서 “저는 대기업이 안 맞아서 제 일을 시작했습니다”같은 말을 뱉어볼 새도 없이 뭔가를 시작해야 했다.


2015년, 볼품없는 7개의 슬라이드로 시작했던 에버노트 콘텐츠를 내 주제로 삼아보기로 했다.

강의를 업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 콘텐츠 자본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봤다. 처음의 강의 콘텐츠는 솜털처럼 가벼웠지만 물을 먹이자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콘텐츠는 점점 불어났다.


"3년 정도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입문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심리적 길이로 적합하다.
3년은 1,000일을 조금 넘는다.
1,000일 동안의 담금질을 통해 꽤 괜찮은 자기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내게는 그게 콘텐츠 크리에이터/코치로서의 삶이었고, 구본형 작가의 말대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갖게 되었다. 2년 사이 콘텐츠 3개를 만들었다. 2개의 콘텐츠를 만들며 축적된 내적인 변화는 세번째 콘텐츠로 이어졌다.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콘텐츠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세울만 한커리어 자본을 갖고 있지 않지만, 꾸준히 콘텐츠 자본을 갖춰 왔다. 운이 좋게도, 콘텐츠 자본은 커리어 자본이 되었다.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내게는 드라마티컬한 변화다.


2-3년 간, 이 변화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콘텐츠 자본을 누적했다. 이제는 또 다른 콘텐츠를 여럿 준비하고, 다른 사람의 콘텐츠까지 기획하고 있다. 담금질의 시간에 대한 구본형 소장의 조언은 나쁘지 않았다. 세상이 내 커리어를 주목해주지 않을 때, 내가 나를 주목하려 한 건 구본형 소장의 덕이 크다.
커리어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지만, 콘텐츠는 늘 지금이 적기다.




크리에이터에 대한 커리어적인 해석

커리어는 기다려주지 않지만, 크리에이터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커리어다.

정말 좋은 점은 모든 걸 내팽겨치지 않고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광고기획사에 다닐 때 내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콘텐츠를 만들어 본 경험을 돌아보자면, 처음 내놓는 콘텐츠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들어보는 일에 자신을 꾸준히 밀어넣다보면, ‘20년의 전문성’같은 건 없어도, 분명히 쌓을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만든 엉성한 콘텐츠가 남는다. 다른 하나는 '만들 줄 아는 나'가 남는다. 이상한 일이다. 만들어보기 전엔 아무것도 없지만, 만들다 보면 그렇다. 크리에이터라는 커리어가 누적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어떤 업을 시작하든 간에 사수가 붙는 신입 시절을 건너뛰어 커리어를 성장시키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공적인 이메일 한 통을 작성하고 ‘보내기’를 누르기 전에 여러번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크리에이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엉성한 콘텐츠 하나 내놓는 일조차 책 잡힐 일은 없는지, 너무 주관적인 얘기는 아닐지 고민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리고 실제로 별 볼일 없는 경우도 많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내가 처음 내놓은 콘텐츠가 그랬다. 모두의 첫 콘텐츠는 ‘나만 보기’로 숨겨놓고 싶다.

분명한 건, 그 조바심 나는 시간을 견뎌서 엉성한 콘텐츠라도 내놓지 않으면 크리에이터라는 커리어는 발생하지 않는다. 


크리에이터, 즉 만드는 사람이 되기가 쉽다거나 모두가 크리에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무리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또, 무엇이든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리 유리하지 않은 커리어 자본을 가진 내가 콘텐츠 자본에 투자한 이후로 적당한 크기의 커리어 방패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의 커리어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콘텐츠 자본이 더해지면 방패를 넘어서 무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크리에이터로만 살기를 권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원래 업을 중심에 둔채, 크리에이터로도 살기는 훨씬 수월해진 세상이다.

커리어 자본 대비 콘텐츠 자본의 가장 큰 장점은 한 번 만든 것은 휘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콘텐츠 자본은 누적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만드는 능력도 휘발되지 않는다. 되려, 적당한 훈련방법을 찾는다면자기 되먹임을 통해서 강화된다. 안타깝게도 커리어 자본은 감가상각이 발생한다.  [감가상각을 거절하라]


나처럼 급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더 단단하게 콘텐츠 자본을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본형 소장의 그것처럼 대단한 명함은 아니지만, 내가 쌓은 콘텐츠 자본으로 명함 한 장은  내놓을 수 있게 됐다.








seolab은 뉴스레터 구독하기 (링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