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부터 유발 하라리까지 강조한 그것!
메타인지에 대하여.
고등학교 3년간 수많은 수업과 자습시간 동안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식이 꽤 될 터인데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30년이란 시간의 탓을 해야 할지 주입식 교육에 탓을 돌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증발해 버려 흔적도 없다. 그럼에도 당시 열여덟 살 학생마음에 콕 박혀 지금까지 인상 깊게 남아있는 한 가지가 지(知)에 대한 공자님 말씀이다.
한자수업시간의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묻는다.
"스승님, 진짜로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로 아는 것이다."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오는 말이다. 어쩌면 고등학생에겐 별로 와닿지 않을 법한 저 말에 나는 요즘말로 뼈를 맞았다.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남긴 덕에 당시 담임선생님이기도 했던 한자 선생님이 저 내용을 설명하던 다소 느긋한 말투와 엷은 미소까지도 생생히 떠오른다.
고등학생시절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뭔지 몰랐던 시절, 잘난 아이들 틈새에서 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 힘들었다. 문과였지만 이과수학을 하면 문과수학이 '껌'이 된다는 말에 이과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어찌 들어가게 되었다. 레테도 없던 그 시절이어서 일까, 그 수업은 내 수준과는 맞지 않는 수업이었다. 친구들이 다 아는 데 혼자 모르는 것이 부끄러웠고 그렇게 그러니 계속 모르는 상태가 이어지는 걸 겪었다.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채로 한 달 즘 만에 학원을 그만둔 터라 공자님의 저 말씀에 깊이 공감했다.
당시 고등학생의 해석은 이러했다. 모른다고 하면 누군가 가르쳐 주겠지만 아는 척하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계속 모르게 되는 거구나. 그러니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 알게 되는 거지!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 나는 교육학 수업에서 Metacognition 즉, 상위인지에 대한 개념에 대해 배웠다. 지금은 메타인지라는 말로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개념이지만 당시로선 전문용어였는데. 그 순간 한번 더 공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는 것은 단순히 모르는데 아는 척하지 말라는 수준의 말씀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지를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다시 한번 크게 공자님의 말이 새겨졌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인생 바쳐가며 연구한 결과로 알려진 개념을 2500년 전 공자님은 이미 알고 계셨나 감탄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다가 또 한 번 공자님을 만났다. 인류가 급속한 과학발전을 이룬 계기는 역설적으로 인류가 과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주 많다는 "무지의 인정"이었다는 대목에서. 무지를 인정하면 매우 확실한 지점부터 출발이 가능해진다. 진짜 제대로 알고 있는 지점부터 연구와 검증이 가능하니 진정한 발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아는 것 같은 것을 안다고 착각한 기간 동안은 큰 발전을 이루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 같다.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아는 듯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메타인지가 강조되어도 그걸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조차 우리에겐 쉽지 않다. 나의 무식과 무능을 과감 없이 바라보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할 용기가 있을 때 유식과 유능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오늘도 읽고 쓰고 돌아보며 나의 무능과 무지를 마주해 본다.
브런치스토리와 연을 맺고 매주 글을 쓰며 메타인지적 관점에서 깨닫게 된 한가지가 있다.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이 넘쳐서 글을 쓰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린 전제라는 것이다. 글을 써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메타인지를 생각하며 글을 읽는 나도 한번 바라보게 되고 글을 쓰는 나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