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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이 Jan 05. 2023

안 망했다

그때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망했다.'

뭉툭해진 빨간 색연필에 달린 실을 당겨내 종이를 벗겨내며 P는 생각했다. 이거 최악인데? 책상 밖으로 튀어나간 시험지를 펄럭 펄럭대며 다음 과목 답안지로 넘겼다. 교실 안은 들뜬 아이들로 소란스러웠고, 으레 시험 기간의 교실이 그렇듯 어수선했다.


그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같은 소란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애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지 채점도 하지 않고 시험지를 구기듯 아무렇게나 접어 가방에 던지듯 넣었다. 반에서 가장 목청이 큰 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책상을 팡팡 쳐대며 웃었다. 손 안 아프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찌익- 찌익- 소리가 나게 시험지를 매기는 애도 있었다. 아 완전 어려워, 하며 실소를 터트리는 애도 있었고, 성적이 꽤나 올랐는지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애는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참는 듯했다.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지?’


P는 연신 시험지와 답안지로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동그라미를 치거나 직선을 힘주어 그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음은 보기에 없는 듯했다. P는 뭐든 어중간했다. 공부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성적은 항상 어중간하게 중간에서 약간 위거나 아래였다. 운이 좋아 공부하는 시간에 비해 성적은 잘 나오는 편이었다. 운을 너무 믿었나, 하고 P는 하-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탐구 영역 시험지를 채점하려고 할 때 즈음 A와 B가 P에게 다가왔다.


 “야, 집 갈 때 얘기 좀 하자.”


A는 건조한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눈빛이 묘하게 차가웠다. B는 멀뚱멀뚱 P를 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A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P는 자신의 성적이 떨어진 건 A와 B 때문이야,라고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최근 P는 A, B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P는 수학여행 이후로 A와 B가 자신과 멀어지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미 충분히 멀어졌다. 둘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며 때때로 흘겨보았다. 이 교실의 어떤 암묵적인 룰에 의하면, 이동 수업이나 급식을 먹을 때 B는 P와 함께여야 했는데, 어느 순간 B는 A와 함께 다녔다. 그 덕에 P는 성적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도 어중간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P는 그 둘이 자신에게 그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P는 싸움을 보는 것과 하는 것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고, 그냥 이렇게 학년이 끝나서 자연스레 멀어지길 바라는 타입이었다. 어쩌면 그냥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A와 B는 P와 정 반대의 타입인 듯했다.


P는 창밖을 바라보다, '밝을 때 집에 가니까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쌌다. A와 B가 자신을 교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어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서 나갔다. P는 신발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잡으며 생각했다.


‘사탐은 그나마 잘 봐서 다행이다.’


A와 B는 뒤돌아 P를 슬쩍 보더니 자기들끼리 대화하며 조금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따금 마주 보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P는 자신이 둘을 졸졸 따라가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아이리버 MP3로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을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엄마에게 [지금 마쳤어!]라고 문자를 보내면서.  


건물 밖으로 나와 좁은 계단 몇 개를 지나, 운동장 옆 좁은 길 끝에 나오는 가파르고 긴 계단을 내려간다. 내리막길 옆에 있는 큰 교회를 지난다. 그동안 P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보다는 저들이 왜 자신을 불렀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생각했다. 혹시 사과를 하려나 약간의 기대도 했다. 미안하다고 피크닉을 사줄지도 몰라. 그럼 그냥 슬쩍 웃어 버리는 거야. 반대로 싸움을 걸면? 상대는 둘이고 난 혼잔데 어떡하지? 벌써 불리하잖아. 나 싸움 못 하는데. 그렇다고 도망갈 순 없지. 쪽팔리잖아. 엄마가 밥 해놓는다고 했는데…. P는 내리막길을 지나 걸어가기도, 뛰어가기도,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 어느 골목길로 들어갔다. 눈앞에는 A와 B의 까만 책가방이 보였다.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눈은 까만 책가방만 좇았다. 가방끈이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A와 B는 얼마 안 가 어떤 빌라로 들어갔다. 동네였지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서 조금 낯설었다. 둘은 빌라 앞 아스팔트 위로 흰 선이 삐뚤빼뚤하게 그어진 주차장 가운데에 멈춰 섰다. 바닥을 보며 걷다 발 네 개가 멈춤과 동시에 뒤를 돌았다. 덩달아 P도 우뚝 섰다.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A는 B를 보며 대뜸 물었다.


“니 뭐 하냐?”


P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건 내가 해야 할 말인데,라고 생각했다. 평소 A의 언행으로 보아 충분히 나올 만한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A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하는 아이였고, 어떤 행동이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장점도 단점도 아닌 그냥 그런 성격이었다. P는 엄지손가락을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다. 오래된 버릇이었다. 주먹은 쥐었지만 입으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원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A는 P의 어떠한 행동들을 지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요약하자면 P 네가 B랑 안 놀아줘서 B가 외롭잖아, 같은 내용이었다. 한 문장에 욕이 꼭 한 두 개쯤 섞여 있었다. 야, 네가 그딴 식으로 행동하니까 얘가 그러잖아, 씨발. 대충 이런 식이었다. P는 그딴 식은 뭐고 얘가 그런다는 건 뭔지 몰랐다. 그냥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A는 B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서만 계속 말했다. B는 그냥 옆에서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P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P는 그게 더 싫어서 B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P는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다. A는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뱉어냈고, P는 거기에 자신이 낄 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P는 틈틈이 짧게 답했다. 근데, 그래서, 그게 왜, 그래. 이따금 한숨도 푹푹 쉬었다.


A와 B는 자신들의 할 말을 마친 듯 유유히 사라졌다. P는 그날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매일 교실에 가면 그들이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망했다.

뭐가 망했다는 건지 자신도 잘 몰랐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앞으로 난 왕따가 되는 건가. 그래, 수학여행 이후라서 다행이다. 하지만 P의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교실은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년이 바뀌었다.


그리고 십 년쯤 지났다.


P는 몇 년에 한 번씩은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화가 나서 베개를 팡팡 쳤다. 주로 새벽에 그랬다. 괜한 자존심에 주위 아무에게도 그날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일은 마음속에서 무거운 돌이 짓눌러 완전히 날아가지 못하고 모서리 파편만 남았다. 그때로 돌아가서 욕이라도 퍼부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아주 가끔 있었다. 시간이 지나 걔네가 뭐라 했는지도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냥 그랬다. 지금 자신이었으면 할 말 다 하고 쿨하게 꺼져, 했을 텐데. 혼자 중얼댔다. 전에 알던 내가 아니라고. 암 그렇고말고.     


어느 새벽 P는 뜬금없이 중학교 친구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갑작스러웠다. 뻔한 하소연이었다. 그냥 답답해서 말하는 건데, 고등학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실 힘들 때가 있더라고. 혼자 삼키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조금 버겁네. 답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너희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조금 괜찮아지려나 해서. 아, 지금은 아무 생각 없긴 한데, 늦은 시간에 미안해. 잘 자.


P의 친구 H는 한참 뒤에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전체 보기’를 눌러야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이야기해줘서 고맙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긴 글을 한 글자씩 곱씹으면서 P는 터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긴 문장들 속에서 P는 유난히 눈에 밟히는 한 문장을 일기에 썼다.


[어떤 경우든 일방적인 건 폭력적일 때가 많으니까.]


그렇다. 아마 그때의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방적인 건 대체로 폭력적이다.


H는 마지막에 정리가 되면 글로 한번 써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H도 P처럼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이라 하는 말인 듯했다. 자신처럼 P가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상처가 아물기를 바랐다. 이 글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너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니, P는 자신이 정말 작가라도 된 것 같아 괜스레 민망해졌다. P는 H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노트북을 켰다. 깜깜한 방 안에서 노트북 화면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P는 노트북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P는 어쩌면 망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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