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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업데이트

by 박모카

예전에 내가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를 실현했던 적이 있었다. 싱가포르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나는 해당 기숙사의 X그룹에 속한 60명 중 단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상가포르, 말레이시아 친구들은 모두 나를 사랑해주었고 마치 케이팝 스타가 된 느낌을 받으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다. 다른 그룹 친구들은 한국인이 있는 우리 그룹을 부러워했다. 나는 매일 아침 7시 식사를 하는 모임을 개최했고 그들도 원했던 캠퍼스 단합을 이뤘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지내며 웃고 떠들기를 3개월. 싱가포르에 겨울이 찾아오자 한국이 그리워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곳에서 로망으로만 가지고 있던 그 모습을 모두 이루었는데 가슴 한편에 슬픈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은 추워야하는데, 비가 오기만 할 뿐 한국의 서정적인 느낌이 없어서였을까.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이 감정에 겨워, '나는 아주 슬프다!!'를 외쳤다. (친구들은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즘은 그 때가 생각난다.

차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 친구가 우리 집에 이사오고 나서, 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집을 비우고 나서부터 우리집은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외국인 친구는 계속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하곤 했고, 이동에 제약이 없어진 우리는 밥집, 볼링장, 방탈출, 코스트코, 다운타운 등 고삐풀린 강아지처럼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문화적 차이와 소통이슈때문에 간간히 시트콤 같은 일이 벌어져서 집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한 번은 제빵을 하는 친구가, 외국인 친구가 아몬드 케이크를 먹는 것을 봤다고 했다. 외국인 친구는 견과류에 알러지가 있어서 절대 견과류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제빵사가 특정 케이크를 봤다고 하니.. 진실은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외국인 친구는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제빵사를 보며 아주 혼란스러워했다. 혼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는지, 주방 맨 끝 벽으로 가, 두 손과 몸을 양쪽 벽에 착 붙인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제빵사를 바라보는 리액션이 너무 웃겨서, 나와 내 옆방 친구는 낄낄 웃어대기만 했다.


할로윈 기념으로 해준 일회용 떡볶이 문신. 친구는 한국인을 만나면 이거 'life of mercy'라는 뜻이잖아? 라고 할꺼라고 했다. 친구는 떡볶이를 아주 잘 안다. :)

최근에는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바리깡이 있긴 한데, 어깨털을 밀었던거야. 너가 쓰고 싶지는 않을껄?'이라고 했다. 어깨털..? 그게 뭐지라는 생각에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자신의 어깨털을 보여줬을 때 1차적으로 매우 충격적이었고 2차적으로는 엉덩이에도 털이 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날 밤, 알고리즘의 영향일까. 유튜브에 '외국인들은 엉덩이에도 털이 수북하다는 정보를 담은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어서, 자기 전까지 어이없는 웃음이 픽픽 났다.


웃긴 일화는 쌓여갔다. 집에 잔소리하는 아주머니가 없으니 더 신났다. 매일이 고전 시트콤 프랜즈를 보는 느낌 (사실 실제로 시청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이었다. 하지만 점점 내가 이사를 나가야 하는 날은 다가왔다. 남편과 아기가 한국에서 오기 때문에, 좀 더 넓고 프라이빗한 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또, 아주머니가 귀국하는 날도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의 행복은 꽤 한정적인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데드라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캐나다에 와서 평균적으로 쭉 행복한 나날만 보내고 있으니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다시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삶을 다이나믹하게 만들어주는 친구들, 또 내가 심심해하면 언제든지 같이 나가서 놀아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참 행복했다. 오히려, 나는 집에 콕 박혀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친구들은 모두 타지에서 외로움을 참 많이 느끼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행복하다는 표현 말고 또 다른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잘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마음일까. 불안정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들 20대 중반~후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ㅎㅎ) 서로에게 의지해가는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나 둘 집을 떠나기 시작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버릴까 생각하는 외국인 친구, 집주인 아주머니한테 당한 것이 많아 한국에 돌아가버릴까 고민하던 제빵사 친구를 보며 '순두부의 멘탈이군 ㅎㅎ'이라며 그들이 안쓰러웠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또 있다면, 다음과 같다.


외국인 친구가 생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사는 중인데, (물론 그 전에도 여행은 많이 다닌듯하다.)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는 것이었다. 추석에 가족이 없어서 울었냐고 장난스럽게 물으니, '기억이 안나'라고 대답했던 그 모습에 놀랐다. 그는 '남자는 문 뒤에서 울지'라는 명언도 덧붙였다.. 그는 마땅한 친구를 찾고 싶어하지만 딱히 찾을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Let's make his friend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흐지부지되었다. 왜냐면.. 한 번 크게 데였기 때문이다. 그는 온라인에서 본 어느 모임을 보고 '이곳이야! 같이가자!'라며 우리를 꼬드겼다. 왠지 목적이 데이트를 찾으러 온 사람들만 득실거릴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친구라고 적혀있잖아 친구!'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뭔가를 할까? 말까? 고민이 든다면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일단 가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임산부에게도 찝쩍거리는 남자들이 드글거리는 탓에 괴로워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외국인 친구도,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좀 이상한 느낌을 많이 주더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날 밤, 나랑 말을 했던 사람 중,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이쁘던 그 40대 아재의 눈이 꿈에 나올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그리고 외국인 친구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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