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주수차가 많아지면서 배가 많이 나왔다. 해외에 홀로 온 터라 돈이 필요했다. 식당 알바라도 알아보고 다녔으나 오프라인으로는 만삭의 몸이 고용주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디든 일할 곳이 필요했다. 미친듯이 지원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써보기로 했다. '나'여야지만 뽑힐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을 했다.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고 싶었다. 해외라서 창업에 정부일에 이것저것 이력이 뒤섞인 톡톡 튀는 이력이 장점이 될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한 달 한 달 흐를수록 나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하고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영어에 자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토종 한국인인 내 특징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중학생 때 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덕분에 중학생 수준의 영어는 할 수 있었다. 발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영국에만 살 때에는 발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싱가포르로 가니 새로 만난 친구들이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적응을 잘 하고 나니 싱가포르 발음도 섞여서 중국억양이 되었다. 캐나다에 와서는 영국발음의 강한 부분을 포기해야 사람들이 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단어에는 더 자신이 없었다. 토플 공부를 한참 하던 고등학생 때나, 아름다운 영어를 구사하는 영국에 살 때에는 좋은 단어를 알고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고급단어를 쓰지 않은지 10년이 넘어가자 내 수준이 초등학생 정도로 회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통역, 특히 의료부분 통역은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기에 통역사가 되기로 했다.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행인 것은, 처음 직장을 통해 트레이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듣고 반복해서 말하기, 노트 적기 같은 연습을 한 달 동안 했다. 같이 훈련을 받는 학생 중, 내가 제일 못했다. 실전에 투입되는 날 떨렸다. 실전은 실전이었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가득했다. 민폐만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응급실에서 전화가 올까봐 무서웠다. 매 전화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받았지만, 상대편에서 전화번호를 빨리 말하는 단순한 것 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중에, 영국에서 알던 친구와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영국에 거의 평생을 살았기에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다. 문화 통역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던 그녀도 통역이라는 행위는 참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고 했다. 언어라는 큰 성벽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한 머리가 발 끝까지 닿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