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독의약박물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말을 들어봤나요? 죽은 뒤에 약처방을 받아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약방문은 지금의 처방전과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은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의사와 유사한 의원이 있어서 백성들을 진료했고, 왕실에서는 의원으로서 관직에 나아간 의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의사이면서, 약사이기도 했습니다. 진맥을 하면서 약도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다르게 의원이 아닌 사람들도 의학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의(儒醫), 즉 선비로서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유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특정한 계층이라기보다는 사대부들이 학문으로서 의학에 대한 서책을 즐겨 보았고, 특히 송나라 이후 성리학에서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연구한다는 맥락에서 인간의 본성, 성질, 형질, 인체에 대한 탐구, 사람들이 겪는 질병으로 사고가 확장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의학에 대한 공부도 함께 해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유의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인 추사 김정희도 있습니다. 김정희는 금석문의 대가로서 글을 잘 지을 뿐 아니라 글씨를 잘 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금석문 : 쇠붙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함) 그런데, 이 뿐 아니라 의약학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습니다. 김정희가 쓴 <완당선생전집>에 따르면 본인의 질병에 대해서도 증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고, 주변인들에게 약방문을 물어보았거나, 약재를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볼 때 추사의 다양한 관심사 속에는 의학도 포함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독의약박물관 소장품인 추사 약방문은 추사 김정희가 작성한 약방문입니다. 삼별건비탕이라고 우측 상단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삼별건비탕은 오랫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리거나 기운이 없는 증상을 치료하는 <동의보감>의 삼출건비탕을 변형한 것 입니다.
삼출건비탕(參朮健脾湯)은 비(비장/備藏)를 든든히 하고 위(胃)를 길러서 음식을 소화시킨다. (健脾養胃, 運化飮食) 라고 효능이 나오며, 아래와 같은 약재를 사용합니다.
인삼ㆍ백출ㆍ백복령ㆍ후박ㆍ진피ㆍ산사육 각 1돈, 지실ㆍ백작약 각 8푼, 신국ㆍ맥아ㆍ사인ㆍ감초 각 5푼.
이 약들을 썰어 1첩으로 하여 생강 3쪽, 대추 2개를 넣어 물에 달여 먹는다고 나옵니다.
人參ㆍ白朮ㆍ白茯苓ㆍ厚朴ㆍ陳皮ㆍ山査肉 各一錢, 枳實ㆍ白芍藥 各八分, 神麴ㆍ麥芽ㆍ縮砂ㆍ甘草 各五分. 右剉, 作一貼, 入薑三棗二, 水煎服.
해당하는 약재들은 약재별로 특성에 따라서 말려진 그대로 쓰거나, 볶은 후에 달이도록 되어 있는데, 원전의 처방과 비교하여 보면, 상당한 약재를 과감하게 바꾸고(후박,지실, 백작약,축사를 뺐음), 양도 다르게 처방한 것(인삼과 별갑은 넉넉히 넣었음)에서 유의로서 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김정희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유물입니다.
약방에 가서 약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의원을 만나기도 힘들었던 전근대 시대에 각 지역의 유력 가문 및 사대부들은 마을 사람들이 아픈 경우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약방문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학문으로서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하였던 유의들은 실제로 백성들을 살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추구했던 바와 부합해 학문은 책상에 앉아서 탐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물이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