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주아주 좋은 날이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이맘때 이렇게 맑은 날은 드물다. 매해 1, 2월만 되면 미세먼지로 새까맣게 뒤덮이기 때문이다. 단숨에 핑강으로 달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종일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딴 길로 샐 수 없었다. 앞으로 1년 동안 타고 다닐 오토바이 구매를 친구들이 도와주기로 한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친구들이 운영하는 카페에 갔다.
케이크를 정리하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 낀 카우 르양? (밥 먹었어?)
- 낀 래우, 임 막. (응, 배불러)
방금 배부르다고 대답해놓고, 갓 구운 레몬 케이크로 눈길이 향했다. 결국 오토바이는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케이크와 책을 주섬주섬 챙겨 야외 좌석에 앉았다.
야외 좌석이라고 해봤자 카페 입구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한 개와 의자 두 개가 전부다. 카페가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평범한 집 몇 채와 인쇄소, 동네 약국 그리고 작은 숙소 두어 군데가 있다. 그 사이를 검은 개 한 마리와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고, 배달 오토바이가 바쁘게 오간다.
그날따라 구름이 하늘에 얇게 흩뿌려져 있어 햇살이 숨었다가 나왔다 하며 글자 위를 돌아다녔다. 다리에 기분 좋은 온기가 돌자, 무릎 관절이 기름칠한 것처럼 한결 부드러워졌다. 흰 종이는 빛을 받아 투명해지고, 딱딱했던 글자에 생기가 돌았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구름을 따라 둥실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커피를 내리며 노닥거리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오후였다.
그렇게 한창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차에, 앞집에서 커다란 호스로 2층 발코니를 가득 채운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1층 양철 지붕까지 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우기의 소리였다. 본격적으로 비를 퍼붓기 전에 꼭 그런 소리가 났다. 지붕 아래로 숨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시간을 벌어 주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코끝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젖은 우비를 오토바이 트렁크에 넣어놓으면 늘 그렇게 축축한 고무 냄새가 진동했다. 어떨 때는 그 냄새가 견딜 수 없이 싫어서, 우비가 있어도 입지 않고 비를 쫄딱 맞고 다녔다.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냄새가 그저 반갑고 기뻤다. 지난 우기 내내, 비가 쏟아질 때마다 잽싸게 나가서 내 헬멧을 가져다주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창 일하고 있다가 테이블에 헬멧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손이 보이면 뒤늦게 비가 내리는 걸 알아챘다. 젖은 헬멧을 쓰지 않도록 챙겨주던 그의 마음을 곱씹다 보니 온갖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토바이를 탈 수 없을 만큼 퍼붓는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먹었던 카오카무,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는 애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 맞춰 부르던 노래, 한국에서 놀러 온 짝꿍이랑 다 같이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던 보드게임, 함께 축하했던 생일들, 카페 문을 닫고 먹으러 갔던 수많은 저녁과 야식들.
동네 산책을 할 때에도 시작점은 언제나 여기, 친구들의 카페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보던 나를 데리고 훌쩍 여행을 가던 날에도 당연히 이 카페에서 모였다. 이곳에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친구들도 만났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온 내가 ‘작년 여름에’라고 입을 떼면, 여름 언제를 말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친구들⋯. 내게 치앙마이는 그런 사소하지만, 애틋한 일상이 있는 곳이다.
앞으로 써내려 가고자 하는 글들은 그 일상의 기록이다. 일하고, 학교 가고, 운동하고, 친구 만나고, 글 쓰고, 책 읽는⋯. 별일 없는 매일이지만 내 인생이어서 소중했던 모든 날. 좋은 날, 나쁜 날, 그리고 그사이에 있는 보통의 날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어떻게든 잘도 굴러가던 여름. 혼자이고 함께였던, 모든 날이 여름이었던 시간. 그 시간 덕에 나는 나로 사는 게 조금 더 좋아졌다. 이 흔적이 누군가에게 닿아, 언젠가의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