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지난주에는 글을 발행했는데도 개운치 않았다. 정작 할 말을 못 한 기분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고, 딴소리를 늘어놓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떠밀리듯 보긴 했지만, 친구 집에서 가진 첫 번째 무비 나잇이었다.’ 그 밤이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았던 것과 영화는 조금도 상관이 없었다. 걔네 집에서 영화를 봤든 대청소를 했든 뭘 했든 나는 그 밤을 무조건 기억했을 거다. 남파네 집에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언젠가부터 친구 집에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같이 학교도 다니고 학원도 다니던 친한 친구 집에 가서 사이다랑 과자를 먹은 게 마지막 기억이다. 그 친구가 멀리 이사를 떠나고 나서는 누구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왜 안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대신에 학교 앞 즉석 떡볶이집을 가고, 캔모아를 가고, 놀이터를 가고, 노래방에 가고, 영화관에 갔다. 그러다 누구 집에 가는 건 좀 어색해졌나. 일단 나는 우리 집이 창피해져서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이유로 불편한 친구가 있을까 봐 너희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정말 같은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집에 오라고 하는 친구도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친구 집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 때나 가서 친구 침대 위에서 울며 나자빠지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캐릭터가 나오지만, 그건 영화나 드라마였다. 내 모든 것이 투명하게 노출되는 공간에 턱턱 들어오는 친구와 내 속을 뒤집어 까서 보여줘도 아무렇지도 않은 친구라니. 이보다 더한 판타지가 과연 있을지.
그런 생각을 품고 무럭무럭 자라서 대학교에 갔다. 대학교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친구들마저 모두 서울 출신 혹은 통학할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붐비는 카페와 캠퍼스 곳곳에 놓인 벤치를 전전했다.
자취하는 친구가 딱 한 명 있긴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고, 꽤 가깝다고 여기던 친구였다. 졸업 전, 개인적인 상황이 몹시 안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만 신세 질 수 있을지 그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역시나 거절이었다. 워낙 사적인 그를 알고 있었기에 예상했었지만 상처받긴 매한가지였다. 내가 그의 성격을 알듯, 그 역시도 내가 어지간해서는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좀 더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면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을지도 모르지만⋯ 모르겠다, 그랬을까?
가족들과 함께 사는 친구들에게는 물어볼 용기도 내지 못했다. 하룻밤 새 또다시 거절을 감당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고, 친구들의 멀쩡한 가족들을 볼 자신도 없었다. 친구의 부모님이 왜 하필 그날 밤 잘 곳이 필요한지 묻기라도 한다면 나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날의 나는 아주 초라했으면서도 치기가 꺾이지 않아서 남아 있는 한 줌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너무 바쁘고 너무 크고 너무 부대끼는 이 세계에서 쥐뿔도 없어도 자기 누울 자리 하나는 있는 걸 당연히 여기는 이들, 맡겨둔 방이라도 있는 것처럼 친구를 찾는 이들, 그런 건 판타지가 맞았다.
남파는 덥석덥석 나를 들였다. 영화 보자고 들이더니 카페 마감할 때쯤에도 내 일이 안 끝난 것 같으면 자기 집에 올라가서 같이 하자고 들이고, 밥 먹자고 들이고, 자고 가라고 들이고, 그냥 별 이유 없이도 들였다.
나는 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속들이 알게 됐다. TV 앞에 있는 빈백의 색깔이나 빨래할 때 꼭 쓰는 섬유유연제의 브랜드를 말할 수 있게 됐다. 책장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벽에는 어떤 사진이 걸려 있는지도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게 됐다. 어느새 얘네 집 화장실에는 내 보라색 칫솔이 놓이게 됐다.
얘는 진짜 좀 큰일날 사람인 구석이 있다. 내가 일 쉬고 글 쓰다가 계속 쓰는 삶을 살고 싶어져서 나중에 밥 굶게 되면 어쩌지 걱정하니까 대뜸 이렇게 말하는 종류의 사람이라 그렇다. 그럼 비행기표만 사서 와, 내가 밥은 줄게. 얘는 장르가 판타지인가 싶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앞에서 일하고 있는 남파한테 대뜸 나중에 나 망하면 진짜 밥 줄 거야? 물어보니 그는 또 덤덤하게 응, 한다. 내가 세모눈을 하고 너 진짜 판타지 맞지? 속으로 생각하는데, 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태국은 밥값이 싸니까 너 한 명 정도 먹이는 건 쉽단다. 우리는 서로 이해했다는 듯이 아아아, 하고 마주 보다가 웃어 버렸다. 얘는 판타지가 맞다.
남파가 진짜 밥을 먹여줄지 아닐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런 미래가 실제 닥치면 중요하겠지만). 그에게 그런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내게 선뜻 준다는 게 중요하다. 걔가 나를 자기 집에도 들여놓고, 자기 마음에도 들여놓는 게 중요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굴욕적이지도 수치스럽지도 쓸쓸하지도 서글프지도 외롭지도 혼자이지도 않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 기분은 내가 정말 혼자가 된다 해도 나를 지켜줄 것만 같다. 아무리 슬퍼도 다음 날 아침에 해가 고개를 내밀면 나도 어떻게든 몸을 질질 끌고 침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 없이는 살아도 우정 없이는 못 산다던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우정 없이는 살아도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편이었지만, 그 여자를 전보다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우정도 참 좋은 거였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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