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김영하 작가는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러니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동일한 기준으로 나의 치앙마이 살이를 보자면, 나 또한 우선 작가이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헬스인이다. 글쓰기와 운동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헬스장은 아무리 바빠도 손가락 움직일 기운만 있으면 꼭 가는 곳이고, 운동은 하루 일과 가운데 내가 각별히 사랑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헬스장을 이렇게나 좋아하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근 들어 치앙마이에서 다니는 헬스장을 좋아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큰 태풍이 몰려와서 며칠째 무서울 정도로 비가 퍼붓던 밤이었다. 비가 그친 사이 얼른 헬스장에 다녀온다고 갔는데,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갈 때가 되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붓고 있었다. 남국의 나무들이 비바람 속에서 휘청거리고, 하늘은 천둥번개로 번쩍이고 으르렁거렸다. 이 정도로 퍼부을 때는 오토바이 운전이 많이 위험해서 치앙마이의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편이다. 마침, 헬스장 영업도 끝난 시간이어서 우르르 다 같이 몰려나온 헬스장 회원들 대다수가 건물 지붕 아래에 앉아 수다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꽂고 혼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잘 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보니, 4개월 넘게 매일 같은 시간에 보던 익숙한 얼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있었다.
“마 짝 티나이 크랍?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마 짝 까올리 카. (한국 사람이에요.)”
그렇게 비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며 나눴던 짧은 대화를 계기로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 후로 헬스장을 오며 가며 가볍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오늘은 어느 부위 운동을 할 건지, 누가 안 왔는지 같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각보다 꽤 좋은 일이었다. 특히, 운동하기 싫어서 몸을 배배 꼬다가 간 날은 그 힘이 훨씬 세게 느껴졌다. 하루는 헬스장까지 가긴 갔는데,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고 영 하기 싫어서 세트 사이사이 쉬는 시간을 평소보다 길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바오가 젤리 한 통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조금 놀라서 눈만 껌뻑이는 사이, 그는 젤리를 든 손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뻗었다. “아오 마이? (먹을래?)”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어색하게 젤리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워낙 몸이 단단하고 울룩불룩해서 그런 간식은 쳐다도 안 볼 것 같은 이가 알록달록 총천연색의 젤리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이란. 그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차례 더 젤리 나눔을 하고 유유히 떠났다. 물론 언제나처럼 운동 재미있게 하라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나는 그날 내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어깨 운동을 무사히 끝마치고 보람찬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시유는 머신 세팅을 헤매거나 잘못 운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곧잘 나서서 도와주곤 한다. 나 역시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스미스 머신으로 오버헤드 프레스를 하는 중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이라 버거웠는데, 시유 눈에도 바벨을 머리 위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내가 금방이라도 다칠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결국 자기 운동하다 말고 후다닥 달려오더니 잘못된 벤치 세팅도 바꿔주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어깨와 손목을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여러 팁을 나눠 주었다.
한 번은 롱풀 동작을 하고 있는데, 시유가 지나다가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을 해주었다. “와, 피. 폼 깽 막막. (와, 누나. 자세가 진짜 좋다)” 롱풀은 등 운동을 처음 배울 때부터 어려워서 헤매던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는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고 느끼고 있긴 했지만, 내 자세를 직접 볼 수는 없으니 늘 맞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 경험이 하나둘 쌓이고 나니, 워낙 내성적인 나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용기를 조금씩 내게 되었다. 먼저 가서 인사를 하거나 매일 하는 동작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동작을 물어보기도 하는 식이었다. 직업도 나이도 모르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이들이어서 가능한 대화였다. 이를테면 광배가 좋은 누구에게는 광배 키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운동을 물어보고, 어깨 후면 운동을 기가 막히게 하는 이에게는 벤트 오버 레터럴 레이즈 자세를 교정받는 것이다. 태국 음식 중 어떤 음식이 프로틴 섭취에 좋은지, 크레아틴은 먹는 편이 좋을지 토론하거나 동일한 부위를 타겟하는 운동 중에서 가장 효과 좋은 동작은 무엇인지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무슨 공부나 일을 하고 있는지, 어디를 놀러 갔다 왔는지, 오늘은 누구 생일인지를 알게 되곤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가리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신나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내가 있었다. 본능에 가깝게 해피 버스 데이 투 유우우, 라고 크게 첫 소절을 부르며 시작했던 생일 축하 노래. 이내 헬스장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떠올라 점점 볼륨이 작아졌던 생일 축하 노래. 그럼에도 축하는 해주고 싶어서 멈추지는 않았던 생일 축하 노래. 옆에 있던 이들이 함께 불러주어서 무사히 끝까지 부를 수 있었던 생일 축하 노래. 그런 날은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가는 길 내내, 미지근하면서도 달콤한 여름바람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어 주는 기분이었다.
최소 주 5일, 평일 저녁 8시 혹은 주말 저녁 7시만 되면 얼굴 보는 사이. 하지만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은 아닌, 서로에게 무언가 해줘야 하는 것도 아닌 느슨한 사이. 어느 날 갑자기 헬스장을 안 나와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친근하지만 친밀하지는 않은 사이.
이런 사이도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사람들을 친구라고 해야 하나, 그저 아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말아야 하나 가늠해 본다. 자신의 선택으로 오랜 시간 동안 신체에 명확한 고통을 가해온 조금 이상한 사람들, 시뻘게진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세트를 끝내고야 마는 사람들, 양손에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는 사람들, 나와 같은 이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이상함을 나열하다 보면 헤픈 내 마음은 어느새 그들 옆에 쪼그려 앉아 있다. 스팟도 해주고 자세도 봐주며 함께 무럭무럭 성장하는 커뮤니티를 제멋대로 상상해 버린다. 운동 끝나고 같이 프로틴을 먹고 헤어지거나 운동하면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서로 놀리기도 하는 그런 사이를 그려본다. 그럼 훨씬 더 즐겁게 오래오래 운동할 수 있을 텐데.
전에는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그 친근하고 이상한 사람들이랑 훌쩍 가까워지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마음을 못 참고 헬스장으로 자꾸만 달려가게 된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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