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어느 날, 군침 도는 제안을 받았다. S와 P가 내일 오후에 친구들과 람빵을 갔다가 다음 날로 넘어가는 새벽에 치앙마이로 돌아올 예정인데 같이 가자고 한 것이다. 람빵은 별것 없는 시골 마을이지만, ‘천공사원’ 때문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해발 1,000M 산꼭대기에 위치해서 동남아 전역의 그 어떤 사원보다도 아름다운 전망을 자랑한다던 천공사원.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싶었다. 문제는 이 사원이 람빵에서도 차로 1시간은 더 가야 하는 곳에 딸랑 지어져 있고, 도착해서도 산을 올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람빵까지는 어떻게 같이 간다고 해도 무박 여행 중에 산을 탈 시간은 없을 게 뻔했다. 결국 말도 잘 안 통하는 어느 동남아 시골 마을에서 혼자 하루 더 묵으며, 산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라는 과녁이 다시 느껴졌다. 혹하는 마음에 덜컥 수락했던 무박 여행에 불참 의사를 밝히고, 갑자기 취소해서 미안하다는 장문의 사과를 덧붙였다.
나조차도 당황스럽게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 나 이렇게까지 가고 싶었던 거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혼자서는 오도가도 못하게 발을 묶어 놓는 이 두려움에 또 졌다는 생각에 부아가 뒤집혔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치닫자, 온몸이 진짜 어디 묶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늘 먼저 날뛰기 시작하는 상상력이 미웠다. 그 상상력에 끝없이 기름을 붓는 어떤 밤이 지긋지긋했다. 태국 시골 지역이나 혼자 여행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서울의 평범한 밤.
*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한참 돈 없던 때, 나는 제법 오랫동안 신림동에 살았다. 그 동네에서도 가장 오래 살았던 반지하 방은 경사진 비탈길에 있었다. 집 앞만 오르락내리락해도 여름이면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겨울에 눈이 오면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였다.
여느 날처럼 인적 드문 골목에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만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경사를 오르다가 버릇처럼 살짝 뒤를 돌아봤다. 남자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오고 있었다. 동네 사람이겠거니 하면서도,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다리를 더 힘차게 움직였다. 그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 원래 속도대로 걷는 중이었다. 역시 저 사람도 집에 가고 있을 뿐이구나, 한시름 놓였다. 나는 그렇게 안심하는 기분이 좋았다. 낯선 이가 잠재적 범죄자일까 봐 긴장하며 걷는 건 정말 피곤한 법이다.
그렇게 앞만 보며 걷다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버릇대로 뒤를 돌아봤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훨씬 뒤에 있을 줄 알았던 그 남자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인지 어떻게 아냐면, 그가 내게 손 뻗었을 때 닿을 뻔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눈동자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그 눈동자에는 살면서 봤던 좋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진짜 해치려는 사람의 눈동자, 그 두 짝의 눈동자는 불같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게 들어앉아 있었다.
눈물이 고이는데 눈물이 안 나고, 비명이 온몸 가득 차오르는데 목구멍에서 소리가 안 나왔다. 고작 100m 남짓 앞에 우리 집 대문이 보였다. 먼저 귀가한 짝꿍이 켜놓은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어, 살 수 있어. 그러면서 달렸더니 대문이 잡힐락 말락 가까워졌는데, 내 머리채를 잡을락 말락 하는 그 남자의 손길도 느껴졌다.
대문을 뜯어낼 것처럼 열어젖히고, 코앞에 있는 반지하 방 현관문에 달라붙었다. 고장 난 지 한참 돼서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대문 문짝이 찢어진 옷자락처럼 달랑거렸다. 그가 기어코 문턱을 넘어서 나를 잡아끌고 갈 것만 같아서 그 남자한테서 눈도 못 떼고 현관문 손잡이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한 채로, 현관문이 부서져라 주먹으로 연신 내리쳤다. 말 못 하는 짐승처럼 으으, 으응, 하는 덩어리만 겨우 내뱉었다. 그 남자는 숨이 가쁜지 허리춤에 두 손을 짚고 호흡을 다듬었다. 가슴팍이 위아래로 들썩거리면서도 나를 쏘아보는 시선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 씨발,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문을 연 짝꿍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말이 곧바로 안 나왔다.
─밖에 누가, 누가, 어떤 남자가, 막 쫓아와.
억지로 짜내듯 말을 밀어냈을 때, 짝꿍이 집 앞을 확인해 봤지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동네 순찰을 돌아봐도 찾지 못했다. 그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뛰는 발로 성큼성큼 쫓아오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조용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창틈으로 새어 나온 노란 불빛이 없었다면, 그래도 그가 대문 바깥에 머물렀을까. 그가 내 머리채를 잡고 뭘 하려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게 일어날 뻔했던 일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강간? 살인? 강도? 상해? 납치? 인신매매? 장기 매매? 그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 두 짝의 눈동자는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그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 남자가 나를 향해서 손을 뻗는다. 아 씨발, 하고 읊조린다.
아무 해도 입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날 밤, 나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혔을까 봐 무섭다. 언젠가는 결국 내 머리채도 잡힐까 봐 무섭다. 그의 손이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의 손에, 신림동이 아니어도 다른 어딘가에서.
*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람빵은 취소했다고 말하고 나자, 내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냥 네가 되고 싶어, 나는 너무 억울해, 정말 너무너무 억울해.
여기서 말하는 내 짝꿍은 키 185cm에 몸무게 82kg의 건장한 남성이다. 그는 나를 보러 치앙마이에 올 때마다 캠핑 장비를 챙긴다. 오토바이 뒤에 텐트랑 침낭 달랑 싣고, 겁도 없이 태국 북부를 휘젓고 다니고 산에서도 잔다. 말이 캠핑장이지 시설도, 사람도 없는 곳에서도 잘만 잔다. 그와 나의 위험 센서는 다르다. 그가 오면 내 활동 반경도 그를 따라 순식간에 넓어진다. 나는 함께 시골길을 달리고, 산꼭대기에만 부는 시원한 바람도 느끼고, 고개가 아플 때까지 은하수를 본다. 키 155cm에 몸무게 50kg의 여성인 나는 그가 있어야만 겨우 잠이 든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서 나는 눈물을 그치고 치앙마이 기차역에 갔다. 마침, 한 승려가 기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매표소로 향했다. 거기서 람빵 가는 기차 시간표를 한 장 챙겼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가야지. 언제일 줄도 모르면서 그 시간표를 손에 꼭 쥐었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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