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모든 날이 여름

by 하니Hani

12월의 헬스장은 정말이지 휑하다. 치앙마이도 예외는 아니다. 감기 몸살을 호되게 앓다 오랜만에 돌아간 헬스장에서 그토록 쓸쓸해질 줄이야. 특히, 2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언제나처럼 북적거릴 줄 알고 갔기에 모종의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대학교 캠퍼스 내에 있어서 학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 정도면 여름 방학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한국과 학사 일정은 달라도 연말은 연말이었던 것이다. 운동 끝나고 다 같이 닭고기 볶음밥이나 먹으려고 했더니만.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이를 찾아 연애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청춘들을 그리며, 나 홀로 이른 올해 회고를 시작했다.


매일 비슷하게 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잘 몰랐는데, 막상 돌아보니 아득한 기분이었다. 듬성듬성 남겨둔 기록을 끌어모아 보니 새삼스러웠다. 얼마 안 된 줄 알았지만 실은 오래됐거나, 엄청 오래된 것 같아도 얼마 안 된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지금 지내는 집만 봐도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겠지 했는데, 지난 1월 중순에 이사 왔으니 슬슬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매일 끌고 다니며 흠집이 늘어난 오토바이는 몇 년이나 타고 다닌 것 같았건만, 차량 등록까지 무사히 마무리 된 건 5월이었다. ‘모든 날이 여름’ 연재를 시작한 건 6월이 다 되어서다.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였다. 그리고 세상은 아주 조용하다.


그만할까?

쓰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초라한 결과를 마주하는 마음이 쓸쓸했다. 처참하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예상한 미래였음에도 조금 무너졌다. 지금 와서 그만한들 그 누구도 말리지 않을 거란 사실이 쓰린 상처에 소금을 와르르 부었다. 말리기는커녕 그만두는지도 모를 텐데,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그토록 고요한 세상 속에서 외로이 쓰는 일. 그 어떤 보상도, 심지어는 약속도 없이 쓰는 일. 그래서 원망할 사람도 한 명 없는 일. 나를 이렇게나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일.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이딴 일을, 어쩌자고.


개발자가 됐을 때는 너무나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다른 듣기 좋은 이유는 이후에 덧붙인 것에 불과했다.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전우애, 의미 같은 건 모두 보너스였던 셈이다.

글쓰기는 반대였다. 이 일은 통과했던 시간과 나를 이해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이름표를 붙이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 작업을 통해서 이 찰나의 생과 그 안에 들어있는 이들이 아주 조금씩 서사가 되어서 변하고, 살아 움직였다. 모두에게 공평한 사실은 아니겠지만, 내가 쓴 모든 것은 틀림없이 나의 진실이었다. 나조차도 부정할 수 없어서 때로는 스스로를 할퀴기도 했던 진실. 그 안에서 나는 숨통이 막혔다가 기어코 숨을 내쉬고, 사는 것처럼 살았다. 좋아요 수나 구독자 수, 돈 같은 건 단 한 번도 보장된 적 없었다. 그런 건 그저 보너스였던 셈이다.


네 글쓰기의 북극성은 뭐야? 언젠가 누가 물어왔다. 그는 내가 이렇게 슬퍼하고, 분노하고, 좌절할 걸 알았던 것 같다. 꼭 써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더라도 너한테만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언젠가를 위해 그런 이유가 하나 있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매일 사는 하루하루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그걸 계속 보여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고. 그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 차마 하지 못한 말도 몸 안에서 진동했다. 쓸 때 나는 내가 되어서 좋다고, 쓰면 쓸수록 더 내가 되어서 좋다고. 어디 속할 수 없을지 기웃거리는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도 맞는 옷 입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고.


그러니까 다른 건 보너스가 맞는 거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익숙한 숫자놀이로 괴로워하다가 패배했다고 단정 지으면, 진짜 패배하는 거다. 대단한 성취와 결과를 축하하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그런 것들만 축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여기에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고통과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다. 다른 무수한 것을 포기하고 고집스럽게 응시한 시간이 있다. 여기에는 내가 있다.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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