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누나, 어른의 의견이 필요해.”
여기 어른 없다고 시치미 떼기에는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내뱉는 말이 많다고 더 잘 전달되는 게 아닌데, 그럴 때의 나는 말을 얹고 또 얹는다.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안달 나고, 당장 뭐라도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에 어리석어진다. 그날 밤도 구업(口業)을 잔뜩 짓고 돌아온 기분으로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말을 좀 덜 할 걸. 아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옅은 후회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말이 사고의 깊이를 드러낸다면 조언은 어른의 깊이를 보여주는 거겠지. 부끄러움에 잠은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언니, 오빠들도 나처럼 잠 못 들고 뒤척이기도 했을까. 순해 보여도 알고 보면 고집불통인 동생이 듣는 대로 할 것도 아니면서 끙끙거리며 찾아올 때, 참 피곤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야 그들이 한참 위에 있는 어른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도 이제야 세상에 부딪히기 시작한 핏덩이이었을 뿐이었다. 시간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쪼들리는 사회 초년생들. 자기 몫의 짐을 버텨내기에도 버거운 어린 나이들. 그래도 길 잃고 상처받은 동생을 받아줬다. 정성껏 들어주고, 고민을 빙자한 한탄을 끝내기 전까지 곁을 지켜줬다. 그러다 한두 마디 해주곤 했다.
내게 시간도 쓰고, 돈도 쓰고, 마음도 쓴 언니, 오빠들에게는 참 미안한 소리지만 그 시절의 나는 종종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내리기 어려운 선택을 내려주고, 정답을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아주 효과적이고,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조언이 간절했고, 그 조언을 디딤돌 삼아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 거지 같은 구덩이들에서 당장 빠져나오고 싶었다. 나조차도 나를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을 고작 몇 살 더 많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바란 것이다. 그렇게 남들이 해주는 몇 마디 가지고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다행히도 어떤 조언은 성마른 나를 이겨내고 살아 남았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어서 기억에 남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조언이었건만 귓가에 맴돌며 몇 번이고 나를 도왔다. 그 말을 할 때 언니의 목소리라던가 눈빛 때문이었을까. 20대를 지나며 회의감이 들거나 두려워지면 나도 모르는 새에 언니와 이야기하던 그 카페의 테이블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길, 빠르고 편해 보이는 길을 가지 않는 건지 스스로 원망스러워지면 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다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는 법이야, 너도 다 해 봐. 그 말에 기대서 비합리적인 나를 자주 용서했다. 조금 더 관대해진 태도로 다음날을 살았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진 요즘, 나는 자주 어린 날의 마음이 된다. 혼자서도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언니가 필요한 순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고맙게도 언니는 다시 한번 흔쾌히 넉넉한 말을 내어준다. 이번에도 어디서나 들을 법한 말이었지만, 그날도 나는 또 언니 말을 믿어 버렸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언니가 말하니까 진짜처럼 들렸다. 그 순간에는 되레 의심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내가 또 잘 찾아갈 거야. 언니도 나도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 둘 다 나이를 먹어 놓고도 용케 달라지지 않았다. 언니는 예전처럼 뭐 하나 대단한 것 없는 동생을 잘도 믿었고, 나는 언니가 점쟁이도 아닌데 언니 말이라면 사실이라도 되는 양 믿었다. 타인이 건네준 실낱같은 믿음에 나를 의탁한 채, 한번 해보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건 무엇일까. 각자 모두 다른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멋들어지거나 실용적인 방법론이 아니라는 정도는 깨우친 것 같다. 아무리 혼자 해내고 싶어도 혼자서는 결코 오래 나아간 적이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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