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우리는 한 해 동안 한 교실에 앉아 태국어를 같이 배웠다. 언어를 배우는 공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를 제대로 나눠본 적은 없다. 태국어는 익히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언어이고, 우리는 서로의 모국어를 몰랐으며, 걔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밥 먹었니, 졸리다, 너무 어려워, 잘 가. 꽤 많은 시간을 옆자리에 앉아 지냈으면서도 고작 나눈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외에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나는 우리를 통역해 줄 다른 친구가 늘 간절했다. 통역해 주던 친구가 화장실 가느라 자리라도 비우면 나도 모르게 자꾸 화장실을 쳐다보게 됐다.
그래도 노력하고 싶었다. 이방인이라는 같은 처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걔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렇게 가까워지지도, 살갑게 굴지도 않는 내게 늘 다정했다. 아파서 학교를 내내 결석할 때도 걔만은 매일 연락을 줬다. 한 번은 정말 걱정이 됐는지, 많이 아프면 참지 말고 자기한테 전화하라면서 전화번호를 남겼다. 태국어도 못 하고, 영어도 못 해서 막상 병원에 가도 막막할 거면서⋯.
그날 밤 걔한테 전화는 안 했지만, 대신에 수업 시간에 배운 걸 같이 복습하거나 좋은 카페나 식당에 가고, 태국 문화를 체험해 보거나 축제에 가며 나름대로는 열심히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는 좋은 사람 같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얘라서 진심으로 좋아하기를 바라고 기다리면서.
내 소망과는 무관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말만 안 통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잘 안 통하는 사이였다. 굳이 따지자면 걔는 무지 신난 골든 리트리버 같은 사람이었고, 나는 강아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완전 고양이 같은 사람이었다. 걔는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워서 견디기 어려워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없는 걸 견디기 어려워했다.
첫 방학을 앞두고 종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걔는 유독 내 팔짱을 끼며 학교 안 오면 외로워서 어떡하냐는 말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선뜻 이해가 안 됐다가 두 번째에는 조금 난감했다. 걔는 정말 외로울 거였다. 수업이 없어서 만나는 사람도 없이 집에만 있으면 골든 리트리버는 병이 나겠지,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이 이해됐다. 세 번째에는 팔짱을 빼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외로움은 달래주면 되는 거니까 어떻게 달래줄지 생각해 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말은 여전히 통하지 않고, 통역해 주는 친구들은 다들 모국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말없이도 할 수 있는 것, 전에 헬스는 하기 싫다고 했으니까 배드민턴을 치자고 해볼 생각이었다. 배드민턴 코트라면 학교 안에도 여러 개가 있었고, 배드민턴 채도 저렴한 편이니 못 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학교에 갔건만, 도대체 왜였을까. 걔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걸어올 때, 화장실 가는 내 팔짱을 끼며 따라올 때, 또다시 외롭다고 했을 때, 서투른 한국어로 ‘어떡해’를 연발했을 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학기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종종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밖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누가 지각이나 결석이라도 하는 날에는 서로 안 오냐고 연락하거나 아픈지 물어봤다. 그렇게 3학기를 보내고, 걔는 모국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걔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녕을 고했다. 절절한 슬픔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뿐하지도 않았다. 하늘도 어정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일 비가 올 듯 말 듯 꾸물거리던 먹빛 구름은 밤이 되어서도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둥둥 떠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잘 안 맞아서 가까워지지 않은 사람이야 한두 명이 아니고, 그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불편한 일도 없다. 걔는 볼 일도 없어진 지금,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 나를 불편하게 한다.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건만, 걔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지면 괜히 자꾸 몸이 더워진다. 걔가 내 팔짱을 꼈을 때 옅게 땀이 밴 피부가 달라붙던 감각, 함박웃음을 짓던 그 애 얼굴 뒤로 끈질기게 쫓아오던 여름의 해, 등 위로 흘러내리던 땀방울들, 그런 것들이 머리 위로 다시 한번 느껴진다. 좋아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다 고맙고 좋지만, 모든 마음에 화답해 줄 수 없다고 그렇게 중얼거려도 결국 나를 덮쳐온다. 외로움을 뻔히 보면서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던 그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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