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이 시작되면

모든 날이 여름 - 시즌2

by 하니Hani

희미한 피아노 선율 위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따스한 주황빛의 조명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언어가 다르고, 각자 읽는 책이 달라도 괜찮았다. 읽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책 읽는 기쁨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곳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 책과는 담을 쌓고 산다던 헬스장 친구들도 처음 경험해 본 독서 모임에 만족스러워했다. 운동이라는 범주 바깥에서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나 역시 몇 주 동안이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나고, 모임을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엽서를 꺼내 들었다. 일요일 밤을 선뜻 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준비한 것이었다. 엽서에는 편지 대신 내가 아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미적지근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애들은 제법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성인 열 명이 데덴찌와 가위바위보를 대여섯 번 반복하고 나서 순위를 매겼다. 그렇게 순서대로 열 개의 엽서와 열 개의 문장을 나눠 가졌다. 자, 자, 이제 가자. 괜히 멋쩍어서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안 돼, 돌아가면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주자. 누군가 띄운 말에 다들 그래그래, 하며 고쳐 앉았다.


“I do not believe that people grow through wounds. Some may grow ⋯ ”

이상이 연인이었던 금홍에게 선물한 문장이었다. 서툴게 번역한 문장이 친구의 폐와 성대를 지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 문장 한 문장, 굵직한 목소리를 따라 바닥으로 차분히 내려앉았다.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이도 잘 자랐으리라 믿는다. 나는 당신을 상처 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낯간지럽긴 해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무척이나 고와서 내 마음이 아닌데도 보듬어 지켜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양귀자, 그리고⋯. 짧은 낭독이 끝날 때마다 감탄사와 웃는 소리, 박수 소리가 뒤섞였다. 별 이유도 없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완전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뭔가 받아들여진 기분마저 들었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몇 달 후, 한국에서 낭독회에 갔다. 빌린 말과 지어온 말을 홀로 소리 내어 읽는 사람들을 들었다. 미세한 떨림이 무대 아래까지 그대로 전달됐다. 그 말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나에게 무겁게 턱턱 쏟아졌다. 나는 왜 그런지 이해도 못 하고, 그 말들을 고스란히 턱턱 받았다.

턱 턱 턱 받으며, 그들의 영혼이 열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 틈 사이로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들었다. 글이 무엇을 하는 장치인지 단숨에 이해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지만, 서로를 본다. 결핍과 희망과 절망과 구원, 이것이 온통 오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 오해를 통째로 받아들인다. 진실은 언제나 다시 이야기될 수 있다. 낭독이 시작되면, 나는 기꺼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찾을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I do not believe that people grow through wounds. Some may grow ⋯”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읽어 내려가던 그 밤을 자주 떠올린다. 이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쓴 글도 읽을 수 없는, 쌍꺼풀이 진하고 머리가 곱슬곱슬한 그 친구가 외국에서 온 문장을 소리 내어 뱉으며 부드러워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대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던 그 마음은 내가 받지 못한 마음이었나, 아니면 주지 못한 것인가. 그때의 걔는 그 부드러운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었나.



안녕하세요, 모든 날이 여름을 연재 중인 하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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