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이 여름 - 시즌2
넷플릭스를 틀어 놓고, 블루베리 생크림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문다. 겹겹이 쌓아 올린 페이스트리가 바사삭 부서지고,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크림이 혀 위에서 녹는다. 옆에 있던 에그타르트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래도 어딘가 허하고 적적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는다. 지난 며칠간, 짝꿍과 밤늦게까지 드라마를 보며 야식을 먹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티브이를 보고, 똑같은 간식을 먹어도 더 이상 그렇게 재미있지도, 맛있지도 않다. 그를 공항에 배웅하고 오면 늘 이런 식이다. 그저 그와 함께라는 이유로 우습고 신나고 흥미로웠던 모든 자잘한 일들이 시든 꽃처럼 생기를 잃고 처량해진다.
짝꿍이 떠나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잠드는 일이 어려워진다. 잠들지 못한다기보다 눈 감고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이 괴로워 자는 게 싫어진다. 그때만큼은 다른 것들로 주의를 흐트러뜨릴 수도, 나한테서 도망칠 수도 없다. 내 슬픔, 내 외로움이 지나치게 선명해진다. 마치 세상에 그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인 것처럼, 내 것만 보인다. 때때로 그들은 헤픈 눈물이 되기도 하고,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자기 의심이 되기도 했다가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는 무기력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 되든 아주 커다랗고 무겁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참을 그 밑에 깔려 그가 떠난 자리를 느끼다 보면 언젠가는 기절하듯 잠이 든다.
핵심은 한동안 그 밑에 깔려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괜찮은 척하지 말고, 불타올라서 무리하게 작업하지도 말고, 곧장 루틴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복에 겨운 줄 모른다는 비난도 하지 말고, 그냥 조금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외로워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달갑지 않은 버둥거림을 그러려니 해야 한다. 좋아하는 도시에 살면서 꿈꾸던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도 힘들 수 있다. 여느 사람처럼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해도 동시에 괴롭고 아플 수 있다. 내 마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떤 날은 머리끝까지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으로 그저 하루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주면 그가 떠난 자리에 고여 든 것을 천천히 흘려보낼 수 있다. 그게 내가 내 슬픔에 해주는 말이다.
썩 나쁘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짝꿍을 배웅하는 순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다.
짝꿍이 떠나기 전, 그에게 물었다. 여기서 지내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금방 괜찮아지냐고, 어떻게 하면 괜찮아지냐고. 그가 유달리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아지는 방법 같은 건 없지. 무던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그도 사람이니 매번 나와 떨어져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은 예상한 바였다. 그래도 그런 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낮 동안 연거푸 이어지는 미팅과 밥 먹듯 하는 야근 덕분에 금세 잊고 현실에 후다닥 적응할 줄 안 것이다.
“일주일 정도면 그래도 괜찮아지지?”
“아니.”
내 예상은 다시 한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3, 4주 정도?”
머릿속으로 얼른 셈을 해봤다. 작년에만 해도 2, 3개월에 한 번씩은 왔으니, 한 해의 절반을 슬퍼하며 보낸 거나 다름없다. 내가 이유인 타인의 슬픔에는 뭐라고 해줘야 하나. 온전히 다 느끼라고? 그러고 나면 결국 흘러간다고? 그건 너무 쉬운 말이다. 지나치게 편리하고 간단해서 잔인한 말이다.
잠들기 전, 나를 짓누르는 그 순간. 이번만큼은 나의 슬픔 대신 그의 것을 보려고 애쓴다. 그의 외로움, 그가 가진 괴로움, 그가 짊어진 무게, 그 사람 마음 저 밑에 있는 바닥을 그려보려고 버둥거린다. 때로는 정신없이 바빠서 그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쌓아뒀을 찌꺼기까지. 불편하고 부대낀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것이어도 그렇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것이어서 더 그렇다.
그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싶다. 어떻게든 들여다 봐주고, 들어 주는 방법을 익히고 싶다. 내가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그 안에 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슬픔을 흘려보내는 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당신에게도 길이 되어 주는 이가 있기를.
치앙마이에서, 사랑을 담아.
하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