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어요.

by 리아
기억이란 본디 의식적인 것으로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그래서 한 번 입력이 되면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보봉호에서는 젊은 남성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인은 이제 아마 노래를 들을 때마다 보봉호를 떠올리겠지.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법은 노래를 듣는 것이다. 어떤 장면을 담은 노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물론 오래 기억되는 만큼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커진다. 좋은 기억이라면 되살아나는 순간들이 그 노래만큼 감미롭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이라면 노래를 듣는 것조차 버거울테니 말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가급적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사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래 없이 다니기를 연습하고 있지만 여행을 하면서는 많이 듣는 편이다. 자주 듣는 음악은 OST였다. 드라마의 한 장면들이 떠올라서 좋았고 영화의 멋진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서 설렜다. 동일한 나라에 동일한 배경이 된 도시는 아니지만, 나는 비긴 어게인에서처럼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야경을 보고 있었고 라라랜드에서처럼 리듬을 타며 거리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80903102736_1_filter.jpeg 우리는 심지어 거리에서도 라이브로 수많은 노래를 접한다. 노래는, 음악은, 기억의 매개를 넘어서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아프고 힘들고 슬펐던 기억도 추억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 추억이 젖은 노래를 오래 듣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언제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아마 십 대의 세 번째쯤 되는 풋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였고 그래서 귀가 닳도록 들었다. 쉽지 않은 짝사랑이었으니 아플 만도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노래였다. 어쩌면 그때 나는 그렇게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도 채 되지 않아 우연히 다시 그 노래를 듣게 되었다. 별빛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순간만큼은 한여름 밤의 소나기처럼 노래가 나를 적셨고 행복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들을 때마다 행복'했던' 시간이 떠올라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두 번째로' 다시 듣게 된 건 이탈리아의 어느 축축한 도시에서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거리듯 부르는 그 친구는 내 눈물을 쏙 빼놓으려고 작정한 것만 같았다. 공교롭게도 몇 년 전과 같은 여름밤이었다. 너무 뜨거워 결코 깊은 잠을 잘 수 없던 무수한 여름밤 어느 한가운데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단꿈을 꾸었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지만 그럼에도 다시 LP판이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LP판 자체가 잃어버린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이어폰을 끼고 다니면 혼잣말마저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혼자 여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입이 마를 만큼 말을 많이 하지 않기에 걸으면서조차 말을 내뱉곤 했으니까. 내가 있는 이곳이 해외라는 사실이 한몫 더했다. 우리말로 중얼거리면 아무도 못 알아듣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남들의 귀와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순식간에 자연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또한 낯선 곳을 낯설지 않은 표정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것은 비단 해외라서가 아니라 국내도 마찬가지지만 여자 혼자 다닌다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는 것과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굳이 티 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익숙한 음악을 듣는 것은 시선까지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매우 도움이 됐다. 익숙한 노래로 고막의 긴장을 풀어주니 동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어깨와 목까지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이곳의 동네 주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편안했다. 겁내지 않고 해질 무렵 호텔을 나설 만큼.


정말이지 음악은 실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인간이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어쩌면 그 순간의 사소한 감정까지도,
모두 연주하듯 떠오르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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