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쉬어요

이 꽃이 지기 전에 봐야죠.

by 리아

목적지를 위해 앞만 보고 걸으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온통 사람들 뿐이다. 나와 같은 행선지를 택한 사람들의 뒷통수와 이미 새로운 것을 본 환희로 가득찬 똑같은 표정의 얼굴들. 유명한 관광지를 보러 가는 길에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것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설렘 가득한 낯빛이 지루해진다.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알 수 없는 동일한 뒷통수가 따분하다. 여행의 70퍼센트 쯤 되니 서서히 낯선 곳에 대한 긴장도 풀린다. 내가 짜온 계획표대로 여행을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조금씩 느리게 걸으니 걸음걸음마다 피어난 꽃이 보인다.



DSC02549.JPG 누군가 두고 간 한 떨기의 꽃이 나의 마음을 잡아 세웠다. 그는 어쩌면 이곳을 지나는 모든 이가 좀 더 천천히 걸어가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꽃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피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니 그걸로 됐다.


벚꽃 시즌에 다양한 행사가 있고 벚꽃엔딩이라는 곡을 농담 삼아 벚꽃 연금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4월의 꽃구경에 얼마나 열광하는지 알 수 있다. 평소에 한 곳에 만개한 꽃을 볼 수 없거니와 군데군데 핀 꽃들에게 쏟을 여유와 시간이 없는 탓이겠다. 우리는 모두 너무 바쁘게 산다. 여행에서도 그렇다. 여행 상품이 모두 '찍고 찍고 찍는' 지극히 관광지 위주의 상품들이고 어딜 가나 일등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모두 한국 단체 관광객인 것을 보면 알 법하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그만큼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했다.

유명한 관광명소 앞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는 사람 구경을 하러 온 걸까, 아니면 관광지를 보러 온 걸까.

원체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벚꽃이 거의 진 일본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그래도 봄이라, 아니 어쩌면 초여름의 날씨라, 꽃이 만개한 곳이 쉽게 눈에 띄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제 몸을 사리느라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꽃은 어디에나 있었고 또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여전히 따뜻했다.

꽃을 보면 쉬어가는 나비처럼, 나도 좀 쉬어가자. 저 꽃이 지기 전에 말이다.


사실 나는 여행 계획을 아주 철저하게 짜는 편이었다. 시간 단위로 동선을 짜고 엑셀로 정리해서 프린트를 하거나 휴대폰에 넣어서 여행을 했으니 지극히 계획주의자의 여행이었다. 짧은 여행일수록 더 그랬다.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은데 시간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준비였다. 우선순위로 두는 것들은 단연 명소와 명물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딜 가나 관광객들 뿐이라 가감 없이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보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는 곳. 모자 착용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분명 이곳 사람이라는 증거다!

마음을 조금 가볍게 먹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안다. 자칫하면 정신까지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렇게 되면 꼭 사고가 나는 법이니 조절이 쉽지만은 않다. 하나씩 '없이 다니기'를 시도해보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계획 없이 다니기였다. 계획이 없으니 여유가 생겼다.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를 보더라도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오롯이 피어나는 꽃 한 송이마저도 소중한 것이 되는 순간이다.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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