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주의(ism)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인가?

by 위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주의’가 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람들은 마치 이 단어들 사이에 명확한 선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이다. 공산주의는 경제 체제의 문제이고, 민주주의는 정치 제도의 문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고 말한다. 이처럼 ‘주의’라는 말은 자주 섞여 쓰이고, 때로는 서로 다른 범주의 개념을 억지로 같은 링 위에 올린다. 그리고 그 용어를 중심으로 서로 뭉치고 다른 용어를 품은 사람들과 대립하기도 한다.




‘주의’의 탄생


‘주의(ism)’라는 꼬리표는 오래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18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철학과 정치가 있었지만, “민주주의자”나 “자본주의자”라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말한 ‘폴리테이아(정체)’는 통치 방식의 구분이었을 뿐, 사상적 정체성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무엇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주의자’는 근대 이후의 산물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가 생겨났지만, 동시에 사회는 불평등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했다. 자유, 평등, 재산, 국가, 권리 같은 개념이 분화되며, 그 각각을 중심으로 한 사상들이 등장했다. ‘주의’는, 바로 그 시대가 만든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었다.



시대의 질문에 대한 여러 해답


19세기 이후의 ‘주의’들은 각각 다른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경쟁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사회의 불안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자유주의 :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국가는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시장과 시민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 : 자유주의의 경제적 형태로, 사유재산과 시장 경쟁을 통해 부를 창출한다고 보았다.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잡는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사회주의 : 산업화 이후 심화된 불평등을 비판하며, 생산의 이익을 사회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유의 공유보다는 분배의 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공산주의 : 사회주의의 급진적 형태로, 계급과 사적 소유 자체를 없애고 공동체적 생산을 이상으로 삼았다.

민주주의 : 정치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제도였다. 모든 시민이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권력은 투표를 통해 위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공화주의 : 공익과 시민의 덕을 중시했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책임 속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보수주의 : 급격한 변화보다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했다. 전통, 제도, 질서를 사회의 안정 기반으로 여겼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다. 자유주의는 권력의 남용을 막는 방법을, 사회주의는 불평등을 바로잡는 방법을, 민주주의는 권력을 나누는 절차를, 공화주의는 시민이 책임을 지는 방식을 고민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모두 시대의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이었다.




생각의 틀에서 편 가르기를 위한 도구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주의’는 단순한 사상을 넘어 편을 가르는 표식이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은 인류를 거대한 이념의 전쟁 속에 몰아넣었다. ‘우리의 체제’와 ‘그들의 체제’가 맞붙었고, 사상은 곧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시기에 ‘주의’는 더 이상 생각의 도구가 아니라, 신앙이나 충성의 언어가 되었다.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복지나 평등을 말하면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현대의 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초의 공산주의와 다르다. 사유재산을 없애자는 것도,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다. 시장이 만든 불균형을 제도적으로 조정하자는 현실적 접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주의’라는 말을 공격의 수단으로 쓴다. 어떤 주장이 옳은지 따지기보다, 먼저 그 사람의 ‘주의’를 규정해 버린다.



경계가 흐려진 시대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국가는 복합적인 체제를 가진다. 자유시장 위에 복지제도를 얹고,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를 함께 운용한다. 어느 한쪽 극단의 ‘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주의’라는 낡은 말들이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우리가 세계를 단순한 대립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편이 갈라진 사회에서는 논리보다 정체성이 더 쉽게 작동한다.


21세기에 들어 이념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보수주의자도 복지를 말하고, 자유주의자도 공공의 역할을 강조한다. 기후 위기, 인공지능, 불평등 같은 문제는 기존의 이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건 어떤 ‘주의’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특징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융합하고 개선시켜서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OO주의’는 사고의 틀이지만, 동시에 생각을 멈추게 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소셜미디어 속에서 너무 쉽게 갈라진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공격이 앞선다. 세대, 나이, 성별에 따라 벽이 높아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깃발에 ‘OO주의’라는 이름을 새기고, 그 아래에서 상대와 대립하며 산다. 그들끼리 모여 분노를 점점 키워간다.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경계에 선다. 한쪽이 완전히 옳다고도, 다른 쪽이 완전히 틀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준만 믿고 살면 편하지만, 그 편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받는다. 역사는 그 사실을 여러 번 증명했다. 불과 수십 년 전에 한국에서도 이웃이 서로를 'OO주의'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잠깐이라도 경계에 서보면 어떨까. 이것과 저것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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