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선순환을 실천하는 이 시대의 어른',
전 IFAD 아태국장, 김훈애
한국 국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젊은 전문가 프로그램(Young Professional Program)’을 통해 유엔 산하 국제금융기관인 세계은행에 입성한 인물. 이후 국제기구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아시아 태평양 담당 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했다. 그리고 2018년, 조금 이른 은퇴를 결정했다. 퇴직, 말 그대로 업무현장에서 벗어났을 뿐 선생은 요즘 우리들의 멘토이자 유쾌한 언니로 현직에서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선생을 만나러 워싱턴디시 조지타운의 고즈넉한 주택을 찾아가본다.
“아마 처음일 거예요. 한국 매체에 내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하는 건.” 김훈애 선생이 뒤뜰 창밖을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우아하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 호기심이 영롱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말할 때마다 싱긋 올라가는 입꼬리. 기개 넘치는 선생을 마주하면서 벅참과 설렘이 동시에 전해졌다.
34년 동안 국제금융기관 전문가로 활동
인터뷰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처럼 시작됐다. 가까이서 본 선생의 얼굴은 전위적인 아름다움과 야누스의 역동성이 공존했다. 진한 커피 한 잔을 그러쥐고 서정적 아리아를 노래하듯 공기 중에 경쾌한 발성을 쏟아냈다. “48년 인가..47년 인가? 어머 벌써 그렇게 됐네요.” 선생이 한국을 떠난 지가 어느새 그렇게나 됐다고 한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보다 외국에서 지낸 시간이 세배 이상 많다. 이 대하드라마 속 여정을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우선 선생을 대표하는 이력인 세계은행 근무 시절로 가보자.
“1984년부터 2012년까지 29년을 세계은행에서 일했죠. 국제기구는 들어가는 과정이 바늘구멍이라고 알려져 있죠. 뽑는 인원이 많지 않을 뿐더러 지원자를 거르는 기준이 까다롭거든요. 정말 확실한 목표의식과 투지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인류애와 사명감이 절실한 직업이에요.”
김훈애는 세계은행이 운영하는 ‘젊은 전문가 프로그램(Young Professional Program)’에 선발돼 입성했다. YPP는 전 세계에서 13,000명이 지원할 만큼 경쟁률이 높은 프로그램이다. 지원자에 비해 뽑는 인원은 일 년에 30명 남짓으로 턱없이 적다. 김훈애는 국제금융기구 채용설명회에서 헤드헌터의 눈에 띄어 YPP에 참여하게 됐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이었다. 국제기구들은 학부 졸업생보다 대부분 석박사급 학력에 일정 수준의 사회경력을 요구한다. 세계은행의 YPP의 경우 32세 이하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로 영어를 비롯한 중국어, 프랑스어 등 제2외국어에 능통하며 3년 이상의 직장경력이 필요하다. 경력은 있되 나이는 많으면 안 되는 이 엄격한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많지 않다. 대부분 대학원생들이나 금융기관, 연구원 등에서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인들이 지원한다. 김훈애는 자기에게 다가온 기회가 황금같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곳이 내 길임을.
국제기구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버티는 자리
세계은행에 들어가 중국, 베트남, 구소련 연방 등에서 경험을 쌓았다. 유엔 산하 기관의 공식 운영 목표는 '빈곤 구제'이다. 개발도상국의 공업화를 위해 돕고 대회 결제에 곤란을 겪고 있는 국가에 장기 대부를 한다. 여기서 김훈애는 국가 프로젝트 책임자이자 프로그램 리더, 매니저의 역할을 했다. 그가 다녀간 모든 곳이 각별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베트남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베트남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가 규칙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어지러운 도로 풍경과 그 속에서 나름의 규칙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 대열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자란 그에게 베트남의 오토바이 군단은 낯선 충격이었다. 안전모 없이 맨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그들을 위해 최소한의 보호 장비라도 착용하게끔 규정을 제안했다. 또 공공시설에서 무료 콘돔 자판기를 놓자는 아이디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세계은행의 일이라고 하면 고속도로를 깔고, 발전소를 세우는 등 나라를 바꿀 굵직한 일만 떠올리죠. 이렇게 교통을 정비하고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이끄는 것도 포함됩니다. 에이즈를 예방하고 건강한 성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 또한 국제기구의 역할이에요. 단 한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합니다.”
IFAD에서 국제 경험 넓혀
최근까지는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아시아 태평양 담당 국장으로 이탈리아에서 생활했다. 이 또한 유엔 산하기구로서 세계은행 업무와 결이 같다. 31개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고 성장을 돕는 관리자 자리이다. 세계은행에서 국제농업개발기금으로 옮겨갈 때만 해도 2~3년만 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고풍스러운 도시 색에 끌려 5년을 머물렀다. 국제기구의 여성 지도자로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그가 돌연 은퇴했다. 정년까지는 아직 몇 년 더 남은 상황, 대개는 정년이 지나더라도 현직에 몸담고 싶어 한다. 일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활력소이자 노후대책이 아니던가. 그런데 김훈애는 거꾸로 조기 은퇴를 결정하고, 워싱턴디시로 돌아왔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제가 욕심이 많은가봐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권한은 제한적이어서 답답함을 자주 느꼈어요. 사회적인 명예나 부 말고 나를 만족시키는 것을 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회사를 나오고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있죠.”
조기 은퇴하고 후배를 위한 멘토링 실천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김훈애다. 33년 동안 사흘이 멀다 하고 출장을 다녔다. 짐가방을 싸고 푸는 데에는 이제 이력이 났다. 정착과 안정, 휴식, 취미가 절실하게 다가왔다. 요즘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고, 운동을 하면서 몸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6시간 넘게 일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던져진 휴식이 과연 꿀맛 같기만 할까? 처음 한 달은 해방감에 기뻤다가 두 달째부터 무료함이 밀려왔다. 늘 바빴던 탓에 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배우지 못했다. 퇴직한지 2년 째. 김훈애의 일상은 이제 자리를 잡았다.
'요리, 외국어 공부, 만남'으로 꽉 찬 일상
세계를 유랑한 경험이 그의 잠재된 미식 본능을 일깨웠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현지에서 먹는 제철 요리. 일하느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것뿐인데 무엇이 고급인지를 감별하는 혜안까지 덤으로 얻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도시라 해도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과 그 안에 녹아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 김훈애는 도시와 사랑에 빠지려거든 그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라고 말한다. 작년에는 파리에서 르 코르동 블루 요리학원을 다녔다. 하루 중 2시간은 요리를 배우고, 8시간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는 시간에도 프랑스어를 썼다. 말과 음식에 정통해지니 프랑스의 내밀한 모습까지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무엇이든 제대로 배우는 것을 좋아하죠.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훌쩍 떠났어요. 마음껏 먹고, 즐기고, 행복하고 싶어요. 삶을 풍성하게 즐기고 싶어요. 내년에는 일본 교토에 가서 말과 요리를 배워볼 계획이에요.”
언어가 경쟁력! 외국어 잘할수록 성장 기회가 많아
김훈애는 6개 국어에 능통하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불어는 유창한 수준이고 일본어, 중국어, 이태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할 줄 아는 말이 다양하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넓었다. 알면 사랑한다. 관심 없던 것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사랑스럽다. 김훈애에게 언어가 그랬다. '사랑해'라는 말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이 러브 유(I love you), 워아이니(我爱你), 쥬뗌므(Je t'aime)로 소리 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미 6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능력자가 굳이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 대해 김훈애는 언어가 경쟁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못하면 그 자체가 장애라고 생각해 원어민 수준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고, 실제로 언어를 많이 알수록 기회가 다가왔다.
맛있게 요리한 음식은 주변 후배들과 나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후배들에게 마음이 더 쓰인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훈애는 어디를 가나 '최초의 한국인' 신화를 기록한 사람이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가톨릭 기숙학교를 입학할 때,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 학생이었다. 국제기구에서 일할 때에도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최초의 한국인 여성'이었다. 개척자의 길은 언제나 외롭다. 고비 때마다 도움을 주는 어른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지금도 고등학교 때 자신의 입학을 도와준 수녀님, 세계은행 선배들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입은 은혜를 선순환하려 한다.
“IMF나 세계은행 같은 6대 국제금융기구의 한국인 비율은 전체 정원의 1% 수준에 불과해요. 한국의 위상에 비해 너무 미미하죠. 목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국제금융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국제기구에 진출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유능한 인력을 배출해내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한 도우려고요.”
젊고 유능한 후배들이 국제기구에 많이 진출하길
김훈애는 다양한 세대를 만나면서 활기를 전한다. 국제기구는 연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장이라기보다는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자리이다. 어린 후배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 가치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또 초급전문가집단(JPAㆍJunior Professional Associate) 과정처럼 학사 학위만으로도 국제기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쉽 기회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기혼 여자 후배들에게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믿으라고 조언한다.
“젊고 똑똑한 한국 여성이 많이 지원하고 있지만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출장이 잦고 업무가 많은 국제기구 특성 때문이지요. 여성에게 유리천장이 작용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그렇기에 저 같은 시니어들이 후배들을 열심히 이끌어줘야겠죠.”
가진 것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아량을 가진 어른. 실제로 김훈애를 마주하고 느낀 소감이다. 특히 그것이 평생 혹독한 경험으로 쌓아올린 지식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았을 테다. 김훈애의 조지타운 싱글하우스는 후배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김훈애는 일주일에 한 번씩 꽃시장에서 생화를 사다 집안을 향기롭게 가꿔놓는다. 언제 불쑥 들이닥칠지 모를 손님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고, 예쁜 꽃으로 내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만족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해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내 싱글 라이프가 좋아요. 누구에게든 반드시 배울 점이 있어요. 타인과의 지적대화를 즐겨요. 그 생경한 기쁨은 억만금을 버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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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애
서울에서 출생한 김훈애는 1972년 미국으로 건너와 UC 버클리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코넬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한국 국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젊은 전문가 프로그램(Young Professional Program)’을 통해 유엔 산하 국제금융기관인 세계은행(World Bank)에 입성했다. 1984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베트남 개발 프로그램 매니저 등을 거쳐 중동ㆍ북아프리카 환경ㆍ농업 섹터 매니저(국장급)를 지냈다. 이후 국제농업개발기금(IFAD)로 자리를 옮겨 2017년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장을 지내며 34년 동안 국제금융 전문가로 활동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