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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Feb 05. 2020

시대와 공간의 대화, 워싱턴D.C. '허쉬혼 미술관'

이우환 단독 특별전



세계 4대 현대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워싱턴D.C. 허쉬혼 미술관(Hirshhorn Museum). 런던에 있는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센터, 뉴욕 모마와 함께 현대미술의 집약체로 불리는 곳이다. 스미소니언 미술관 산하 국립미술관으로 1974넌,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가 조셉 허쉬혼(Joseph H Hirshhorn, 1899-1981)이 평생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하면서 탄생하게 됐다. 재력가이자 광적인 아트 컬렉터이기도 했던 허쉬혼은 회화와 조각 6,000여점을 모아 모두 기증했는데, 박물관이 개관한지 45년이 지난 지금은 두 배에 달하는 12,000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허쉬혼 미술관은 여느 스미소니언 계열 박물관들과는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작품의 가치나 규모, 인지도 면에서는 세계 정상급으로 통한다. 이곳 야외 전시공간에서 한국작가 이우환의 단독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허쉬혼 미술관이 기존 설치미술품으로 모두 치우고 단 한명을 위해 야외 광장을 통째로 내준 경우는 개관 이래 처음이다.  



Lee Ufan, Relatum—Horizontal and Vertical, 2019

 

Lee Ufan, Relatum—Fountain Plaza, 2019



Lee Ufan_Open Dimension at the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2019


Lee Ufan, Relatum—Position, 2019 ⓒhirshhorn.si.edu
Lee Ufan (1936~) ⓒpacegallery.com

 


이우환 작가, 야외 정원에서 '관계항' 시리즈 단독 전시 

전시작품은 '관계항(Relatum)' 시리즈 10점, 신작 회화 '대화(Dialogue)' 4점이다. 이우환 작가는 자연에서 채집한 재료를 그대로 사용한다. 바위와 철, 봉을 간단하게 배치한다. 분수대 주변을 철판으로 두르고 분수대 물을 검은 물감으로 염색했다. 검은 물이 솟구치자 용암이 폭발하는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요한 물 위에 두 개의 돌을 띄워 하늘과 건물, 빛을 모두 비춘다. 단순한 소재 조합이 자연과 여백, 공간과 어우러져 해의 모습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다양하게 변모한다.  


전시 주제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유심히 살펴보면, 어떤 작품은 철판과 돌이 붙어있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돌이 철판을 누르고 있기도 하다. 또 수평을 이루기도 하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엇갈려있기도 하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가장 원초적인 덩어리인 돌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대표 소재 철을 결합해 자연과 산업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우환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2년 동안 미국 롱아일랜드 채석장에서 돌을 고르고 준비했다.  


모노하(物派) 운동 선두주자 이우환 작가 

돌은 이우환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이다. 1960~1970년 일본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 '모노하(mono-ha)' 운동을 주도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모노’ 는 일본어로 물체, 물건을 뜻하는 단어로, 모노하는 화폭에 붓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존의 미술관에서 벗어나 종이, 돌, 나무 등 자연의 소재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하는 현대미술운동이다. 모노하 작가들은 '만들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대신 사물을 그대로 옮겨옴으로서 본질을 강조한다. 또 그 사물이 있는 위치, 모양 등 시공간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60년대에 일찌감치 예견했을까? 궁극의 단순함, 미니멀리즘이 미학인 기대가 곧 오리라는 것을.
 

모노하 운동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 조각을 하지 않는 조각가를 사람들은 미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을 마당으로 끌고 온 것이 무슨 예술이냐고 비아냥거렸다. 동양에서 출발한 운동이지만 정작 일본과 한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유럽에서 그의 예술세계에 관심을 보였다. 1971년 파리 비엔날레에 초대받아 작품을 소개한 것이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발판이 됐다. 유럽에서 호평을 받자 일본에서 그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1980~1990년대 유럽과 아시아 무대를 상대로 성공한데 이어 2008년에는 뉴욕 페이스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여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Lee Ufan, Relatum—Box Garden, 2019



Lee Ufan, Relatum—Ring and Stone, 2019

 


Lee Ufan, Relatum—Dialogue, 2019 ⓒChloe Lee

 



'점, 선, 여백'에 초점 

허쉬혼 미술관이 한국작가 이우환에 주목한 이유가 뭘까?  낭만파를 시작으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구성파, 키넥트 아트 등 각 사조는 모두 유럽에서 출발했다. 20세기 들어 미국의 앤디 워홀이 팝아트를 선도한 것이 고작이다. 이우환 작가의 모노하 운동은 거의 유일한 동양 미술사조이다. 허쉬혼 미술관은 현대미술계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이우환 작가의 독창성에 주목한다.  


3층 전시실에 걸린 그림 '대화' 시리즈는 큰 캔버스에 한 번의 붓질을 담아 표현했다. 여백이 가득한 화면 위에 점들이 진해졌다가 흐려졌다가를 반복한다. 안료를 찍어 캔버스에 묻혀나가는 방식으로 붓끝에서 물감 농도와 색을 조절한다. 각기 다른 작품이지만 모두 미묘한 규칙이 있어 한 눈에 이우환 작가의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다. 1970년대 그린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는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품,  점과 선으로 대표되는 시리즈를 통해 자기만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다져나갔다. 


이우환 작가는 그림 한 점당 30억 원을 넘어서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그리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정작 그는 가격으로 평가되는 것에 관심 없다고 하지만, 작품이 해마다 고가를 경신하고, 위작 논란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유명세를 실감하게 된다. 이우환 작가 특별전은 허쉬혼 미술관 개관 45주년 기념전으로 내년 9월까지 열린다.  



Barbara Kruger_ BELIEF+DOUBT,

 


Damien Hirst- The Asthmatic Escaped II (1992)



Pat Steir- Color Wheel (2018~2019)

 



Ron Mueck- Untitled (Big Man), 2000




Yayoi Kusama- pumpkin (2016) ⓒhirshhorn.si.edu




야요이 쿠사마, 잭슨 폴록 등 대표 현대미술 작품 소장 

현대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참신함과 함의이다. 얼마나 새로운가, 그리고 얼마나 깊은 뜻을 품고 있는가가 작품성을 결정짓는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일반적으로 읽히는 낱말로 사물을 규정하지 않는다. 점점 작가 개인의 내밀한 세계를 작품으로 승화한다. 흔히 현대미술을 '낯설고, 어렵고, 문턱이 높다'고 칭하는 이유이다. 허쉬혼 미술관은 독창적인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온 카와라(On Kawara),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과 한네 다보벤(Hanne Darboven), 드립 페인팅의 거장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등 현대미술을 이끄는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Marcel Duchamp-The Barbara and Aaron Levine Collection

 


Marcel Duchamp-L.H.O.O.Q., 1919/1964



Marcel Duchamp-The Barbara and Aaron Levine Collection ⓒhirshhorn.si.edu

 



마르셀 뒤샹 특별전 'The Barbara and Aaron Levine Collection개최 

현재는 이우환 작가 특별전과 동시에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특별전도 열리고 있다. 바바라 리바인과 아론 리바인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L.H.O.O.Q'. 백만불 짜리 미소가 자랑인 모나리자 얼굴에 콧수염, 턱수염을 그려 넣어 정면으로 비틀었다. 그림은 예상대로 발표되자마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수염달린 모나리자의 충격적인 모습도 문제이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목 때문이다. '엘.아쉬.오.오.큐'는 불어로 빨리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그녀는 음탕하다)'라는 문장이 만들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다빈치의 대작에 수염을 그려 넣고 말장난을 덧붙인 뒤샹의 행위는 그야말로 정통 예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돌출 행동이었다. 프로 체스 선수이기도 했던 뒤샹은 만 레이 체스의 말을 각별히 아꼈다. 일반적인 체스의 말들에 비해 굉장히 간결하고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사진과 체스판도 감상할 수 있다.  


허쉬혼 미술관은 올해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 ‘원더우먼 1984’에도 깜짝 등장할 예정이다. 워너브로스가 공개한 예고편에서 주인공이 허쉬혼 미술관에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실제 배경지인 사실이 알려져 벼락 스타가 된 '미국 자연사 박물관'처럼 허쉬혼도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워싱턴D.C.의 조용한 거장 허쉬혼 미술관의 도약이 기대된다.  
   


Jimmie Durhan, Still Life with Spirit and Xtitle (2007) ⓒChlo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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