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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Sep 09. 2020

'즐거움 좇아 쉼 없이 달리는 금속공예가의 열정'김홍자

'즐거움 좇아 쉼 없이 달리는 예술가의 열정' 금속공예가 김홍자 


‘예술과 삶이 함께 흘러간다는 게 저런 거로구나.’ 김홍자 선생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대가의 여유와 자신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예술 여정을 풀어 놓으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열정'과 '긍정'이었다. 


만 80세를 넘긴 금속공예 큰 어른이 유독 열정을 강조한 이유가 뭘까? 42년 동안 재직한 몽고메리칼리지 금속미술과 교수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예술 과업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일에 도전했다. 한국 전통 금속공예 기법을 소개하고 19세기에 걸친 오랜 시간 동안의 작품을 집대성한 책을 영어로 집필했다. 책 제목은 <Korean Metal Art>, 한국 금속 예술이다. 천마총 금제 관모 같은 국보급 문화재부터 현대 작품까지 아우르며 금부, 포목상감, 칠보 등 한국 금속 예술 기술을 집대성한 내용이다. 이 모든 것이 영어로 출간됐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글로 썼다면 우리끼리 소비되고 말았겠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길 원했어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제야 큰 숙제를 마친 기분입니다.” 



전통 금속 공예 기법 담은 <Korean Metal Art> 발간 

여기저기 문헌에 기록된 조각 정보를 끌어 모으고, 동료 후배 작가들의 협조를 구하는 번잡한 과정이었다. 자료 조사를 위해 한국 곳곳을 찾아다닌 것은 물론이요,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미국 보스턴박물관 등 박물관 13곳을 찾아다니며 세계에 흩어진 한국 금속 공예품을 찾는데 주력했다. 준비에서부터 출간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2014년, 만 75세에 교수직 은퇴를 준비하면서 풀브라이트 장학금 신청을 했다. 선생은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홍익대학교, 원광대학교 등에서 세 차례나 학생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또 다시 선정될 확률은 희박했다. 그러나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 결국 지원을 끌어냈다.  


“작품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는 대신 기법별로 소개했어요. 장인들의 제작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을 이어온 전통 기법을 현대 작가들이 어떻게 계승하는지 기록했습니다. 특히 금부는 한국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죠.” 


한국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기법 소개해 

대부분의 공예 기법이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지만 한국에만 있는 몇몇 기법이 있다. 고유한 기법을 찾아내 기록하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금을 녹여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인 금부는 소리 나는 대로 keumboo, 입사는 Ipsa, 옻칠은 Ottchil로 표기했다. 영어 책에 이렇게 한글 발음의 영어식 표기를 쓴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철학이 엿보인다. 


'인디즈 올해의 출판상' 최종 후보에 올라 

선생은 내내 뿌리에 대해 강조했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이 있는 것처럼 현대 작가들이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고 한국적 특색을 작품에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또 전통을 제대로 공부하는 작가가 훌륭한 창작물을 낳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에게는 교과서 같은 지침서가 될 테고, 해외 독자들에게는 한국 문화 예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증명서가 된다. <Korean Metal Art>는 대한민국 미술사에 선물과도 같다. 이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의 저명한 서평지 포어워드 리뷰즈(Foreword INDIES Book of the Year Award)의 '2019 올해의 출판상' 예술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포어워드 리뷰즈 출판상은 대형 출판사를 제외한 출판사와 독립 출판 도서들이 후보에 오른다. 우승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후보작(INDIES Finalist)에 오른 것만으로도 포어워드 리뷰즈에 기록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2019년 선정작으로 게재되는 영광스러운 상이다. 


“평생 금속공예를 하면서 국제적으로 서른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세계 각국 대학과 공예 전문학교에서 백삼십 번의 강연을 했어요. 오랜 세월 한국 전통 금속공예 기법을 알리는 일을 해오면서 그 기록을 남기고 싶었죠. 이제 홀가분합니다. 제 예술 인생을 되돌아보는 배움의 시간이었어요.”



남녀 쌍둥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차별, 성공의 밑거름이 되다 

김 씨 문중에 우렁찬 사내 아이 울음소리가 퍼졌다. 가족들은 '아이고 아들이네'라며 기뻐했다. 기력을 모두 쏟은 아이 엄마는 그대로 까무러쳤다. 그런데 아이를 받던 의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어! 한명 더 있었네. 이번에는 딸이네.' 한 배에 아들, 딸 쌍둥이가 들어 있다가 30분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왔다. 아들을 낳은 줄 알았던 엄마는 깨어보니 아들, 딸 엄마가 돼 있었다.  


세계를 대표하는 금속 공예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김홍자 선생은 그렇게 태어났다. 출생은 낙인이 되어 자라는 내내 선생을 힘들게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모네 집에서 수양딸로 자랐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8살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른 형제들 모두 덕수국민학교를 다닐 때, 선생만 혼자 서대문국민학교를 다녔다. 쌍둥이 오빠와 같은 학년, 같은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이란성 쌍둥이가 흉이었나봐요.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게 했던 걸 보면 말이죠. 제가 11살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부산 동래로 피난을 가서 그곳 국민학교를 다녔어요. 그때 처음 쌍둥이 오빠와 한 학교에 들어가게 됐고, 우리가 쌍둥이라는 사실이 주변에 자연스럽게 알려졌어요.”


전쟁과 피난, 이민. 선생의 입을 거쳐 담담하게 던져진 단어들이 맵고 아리다. 우리네 아픈 역사를 관통하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민사는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와이 빅 아일랜드 코할라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정착한 외할아버지와 선생의 어머니는 한인기숙학교에 다니다 광복 후 한국을 찾았고, 선생은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도 하와이대학교를 거쳐 캘리포니아 신학대학, 인디애나대학교까지 학위를 마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국이름 코멜리아, 정체성 담아 직접 지어 

여러 곳을 부유하면서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생각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금속 공예에 대한 열망이었다. 코멜리아 오킴(Komelia Okim). 선생의 영어 이름이다. 코리아(Korea)와 아메리카(America)를 합친 이름에 일본계 남편의 성 오시로(Oshiro)와 아버지의 성 김(Kim)을 합친 이름이다.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낸 이름이 있을까. 1961년 미국에 건너와 어느덧 60년이 지났어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싶어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평생 7개의 이름을 가졌어요. 처음 태어났을 때 제 이름은 김후식이었어요. 30분 먼저 태어난 오빠는 선식이었죠. 부모님이 홍자로 개명해 주셨고, 결혼하면서 또 성이 바뀌었죠. 이 이름들이  이방인으로 살아온 제 이민 역사를 응축하고 있어요.”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 계기로 한국 금속 공예에 관심 가져 

60년대 당시, 금속 공예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미술대학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한국 색채를 담은 금속 공예는 더더군다나 미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스스로 발품을 팔아 분야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풀브라이트 교환 교수로 한국에 왔던 일이 계기가 됐다.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금부, 와 쪼음입사 같은 전통 기법들을 익혔다.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자신의 작품 활동 폭을 꾸준히 넓혔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8개월간 연구한 뒤에는 자비로 1년간 한국에 머물며 자료를 수집했다.  


남편의 열린 사고 덕분에 경력 발전시킬 수 있었다 

믿어주고 응원하는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선생의 남편 오시로 씨는 훌륭한 예술 동반자이자 지원군이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지금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시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모두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는데 집중했다. 선생이 여성 예술가로서 경력 공백 없이 학업과 일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편이 있었다. 오시로 씨는 아내가 하는 일에 한 번도 제동을 건 적이 없다. 아내 스스로 괜히 눈치가 보여 망설이고 있을 때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성공하고 싶어 결혼한 것이지 식모를 들이려 결혼한 것이 아니다'라고 과감하게 등을 밀어줬다.  


“2020년대를 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일하는 여성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잖아요. 몇 십 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해외 유학도 못 갔겠죠. 여자라서 투표도 못하고 일도 못했겠죠. 이민은커녕 태어난 나라에서 그대로 살았겠죠. 그래서 저는 최대한 2020년에 사는 지금을 즐기려고 합니다. 현대 문명을 다 누리면서, 최신 기술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요.”



몸은 늙어가도 마음만은 젊게 살고 싶다는 선생의 말이 인상적이다. 지금은 적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욕망 억누르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매일을 열정적으로 사는 선생의 삶이 눈부시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모두 갖췄을 때 가치 높아져 

선생의 작품은 선이 유려하고 섬세하다. 그 와중에 인간미와 실용성도 느껴진다. 예술 작품이 눈으로 보았을 때 아름다운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리 생활에 쓰였을 때 가치가 더해진다고 생각해 요즘은 유골함, 다기 같은 작품을 주로 만든다.       


선생의 작품들은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미국 뉴욕 아트 디자인 박물관(Museum of Arts and Design-MAD),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그리고 가장 아끼는 보물들은 개인 전시장에 소장하고 있다. 45년이 넘은 오래된 집을 보수해 2층을 갤러리로 꾸몄다. 선생의 예술혼을 바친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인터뷰 말미에 선생이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다. 


“저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에너지가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에너지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이고, 밝고, 건강한 에너지는 태도와 자세에서 나옵니다. 삶을 정성스럽게 잘 매만져주는 사람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건강한 에너지가 흐르죠.” 


주변을 명료하게 정리해야 건강한 에너지가 생겨 

사람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에너지, 그러니까 '기'가 있어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주변에 부정적이고 복잡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들이 많을수록 우리네 삶이 복잡해진다. 긍정적이고,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것들만 둘수록 삶이 단순 명쾌해진다. 선생은 그러니 언제나 주변을 잘 관리하고 좋은 에너지만을 곁에 두고 살라고 조언한다.  


풍진 세상을 겪어낸 현자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여든이 넘은 대가가 늘 경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선생의 갤러리를 맑고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에너지를 재생산하면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말하는 김홍자 선생. 앞으로 어떤 행보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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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자(Komelia Okim) 

미국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칼리지 금속미술과에 42년간(1973-2014)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 교수이다. 국제적으로 30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 뉴욕의 아트 앤 디자인 박물관, 호놀룰루 박물관,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렌윅 아메리칸 박물관, 한국의 국립 현대 박물관 등 세계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 번의 풀브라이트 국제 교육 재단의 교환 교수, 학자로 선정되어, 한국의 홍익 대학교와 원광 대학교에서 미국의 금속 미술을 가르치며, 한국 전통 금속공예기법에 대한 연구와 실습을 했으며, 미국 외 캐나다, 중국, 프랑스, 노르웨이, 러시아, 타이완 등 각 지역의 대학교와 공예 전문학교에서 130여회의 강연과 워크숍을 통하여 한국 전통 금속공예 기법을 소개하였다. 

한국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섬유 미술 전공으로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2학년부터 섬유 미술과 금속 미술 전공으로 학사를 마친 후 3년 과정의 금속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7년에 한국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VOL.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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