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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Oct 07. 2024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추석이 지났다. 부모님과 떨어져 해외에 살다보니 북적이는 명절 분위기가 많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 명절 풍경을 떠올려보면 가족이 모여 재미있기도 했지만, 가족이 모였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남자 어른들은 술상에 모여 앉고, 여자 어른들은 부엌에서 부지런히 안주를 마련한다.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술상이거늘 이내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간다. '맏형이 더 가져갔다, 차별 받고 컸다,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주로 이런 익숙한 주제들. 한국인에게 유산이란 당연히 부동산, 돈 같은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가 죽으면 형제까리 돈 갖고 싸우는 일이 당연한가. 지구 어딘가에서는 유산을 색다르게 해석하는 가족들도 있지 않을까. 


답을 하정 작가의 에세이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에서 찾았다. 작가는 덴마크에서 독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한 덴마크 여자를 만났다. 얼결에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그를 따라 덴마크로 돌아와 그의 가족과 지냈다. 73세 은발의 덴마크 엄마 아네뜨와 딸 쥴리,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가족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네뜨의 아버지 어위까지 3대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하정 작가는 이들의 삶을 알고 싶어 다음 해 여름 한 달 동안 모녀와 함께 살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기록하는 ‘포토 북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00년대 중반 산업디자이너로 활동했던 할아버지 오게로부터, 보석 디자이너였던 엄마 아네테를 거쳐, 책이나 누리집에 실릴 일러스트와 사진을 고르는 포토 에디터인 율리까지, 이들에게는 대를 거듭해 이어진 선이 있었다. 이들은 직접 만들거나 이곳저곳에서 모은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생에 촘촘히 각인하고 산다. 유산 창고에는 '북유럽' '디자인' '명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30년간 느긋하게 놓은 자수, 돌멩이나 종잇조각, 해변에서 주운 화석 등 잡동사니도 그득하다. 누가 보면 쓸모없는 것들을 가족은 곱게 간직한다. 이 가족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덴마크인들의 물건에 대한 철학이 인상 깊었다. 내가 생각하는 유산은 집, 땅, 현금 같은 재물 재화이다. 덴마크에서는 돌아가신 분이 쓰던 가구, 시계, 소품, 옷 등... 사랑하던 사람이 쓰던 물건을 유산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주인공 아네뜨 집 역시 위대한 유산으로 꾸며져 있었다.  증조할머니의 책상을 손녀의 작업대로 쓰고, 아버지가 만든 소품들이 집 안 곳곳에 전시돼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고전소설 같았다. 서사가 담긴 물건들은 어떤 신상품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동네에서 벼룩시장이 열리자 율리네 가족은 지하 창고에 보관하던 유품을 정리했다. 가족회의를 거쳐 일부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 물건을 정말 필요로 하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나눠야 물건도 다음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에게 물려주는 게 유산이라면 핏줄만이 가족이 아니다. 내 핏줄이 아닌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물건이 아닌 생각과 가치관도 유산이 될 수 있다.  


물건뿐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나 말, 손길, 시선, 관심 하나하나가 사람에게 남겨져 영향을 준다는 생각도 우리는 같았습니다. 내 밖으로 꺼내어져 누군가에게 전달된 것이 인생에 평생 남겨질 이야기가, 유산이 된다는 것을요. - p.196  


우리 역시도 물건이 가지는 의미를 단순히 소비 내지는 취향의 문제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태껏 살면서 얻은 소비 교훈이 있다면 "망설이는 이유가 가격이면 사고, 사는 이유가 가격이면 그만둬라"이다. 싼 맛에 혹해 물건을 사면 그만큼 쉽게 버려진다. 오히려 가격은 조금 나가더라도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물건을 신중하게 골랐을 때 더 만족감이 높았다. 물건과 나만의 친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애착과 추억이 쌓인다. 쉽게 사고 쉽게 버려질 조악한 물건보다 하나하나 의미가 담긴 물건들로 내 공간을 채우는 재미에 빠졌다.  


책을 읽으면서 덴마크 가풍이 부럽기도 했다. 좋은 물건 대대손손 물려가면서 가보로 남기는 게 좋다는 걸 그 누가 모를까. 하지만 한국은 전쟁과 가난 때문에 뿌리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덴마크는 우리처럼 외세 풍파로 도시가 파괴된 역사가 없다. 어쩌면 그들의 유산 문화는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이 가져다준 필연적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동시에 한국의 역사에 애틋함을 느꼈고 이제는 내가 무언가를 모으고 간직하는 첫 세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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