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 보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사고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보통 일상의 경험과 영화, 책에서 본 내용에서 영감을 받는데, 기대만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나의 창조력은 여기까지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괴로운 이유는 고민과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다정한 서재' 북칼럼만 하더라도 문단은 몇 줄로 쓸 것인지,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무엇을 강조해야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을지 따위를 치열하게 신경 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창조적인 사고를 훔쳐보기도 하는데 최근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책은 20년차 매거진 에디터 최혜진의 <에디토리얼 씽킹>이다.
어떤 분야에서 매우 심취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에는 명사를 동사로 받아버린다. 커피 한두 잔 즐기는 경우 '커피 마신다'라고 하지만, 커피를 공부하고, 찬미하고, 집착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커피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 책은 '잡지하는' 사람이 쓴 책이다. 브랜딩, 저술활동, 강연활동 등 많은 명함이 있지만 그의 정체성은 결국 잡지일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의 책을 차근차근 살펴가며 이야기해보자. 참 잡지스러운 사람, 최혜진의 전지적 편집자 시점 사고를 들여다본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재배열하는 일이 에디팅, 즉 편집이다. 편집은 무기다. 어떤 한 사람의 365일 24시간을 카메라에 전부 담아 편집자에게 가져다주면, 그는 주연 인물의 인생을 갈기갈기 조각낸 뒤 이리저리 끼워 맞춰 그를 영웅으로도, 사회의 지탄을 받는 범죄자로도 만들 수 있다. 편집이 무서운 이유다.
이를 테면 2020년 5월 뉴욕타임스의 신문 1면이 있다. 당시 어느 매체든 '코로나 신규 확진자 00명' 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앨런 룬드, 81세, 워싱턴, 가장 놀라운 귀를 가진 지휘자' 이런 식으로 고인을 애도했다. 두 전달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뉴욕타임스는 비극을 숫자로 요약하는 대신 개개인의 삶을 요약했다. 독자는 비로소 우리가 코로나로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최혜진 작가는 바로 이것이 에디팅이라고 강조한다.
바야흐로 온 국민의 에디터 시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릴 때도 그냥 툭 올리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몇 줄의 설명이나 나의 감정을 담아서 올린다. 어떤 사진이 나을지 배치도 고민한다. 어떤 의도와 기대효과까지 내다보기도 한다. 유독 감각이 남달라 눈에 띄는 인스타그램이 있다. 똑같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올리는 SNS 공간인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더 눈에 띌까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에디토리얼 씽킹에 담겨 있는 능력, 기획의 힘이다.
잡지 에디터가 하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에디터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데이터 재료들에서 의미화 할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하고, 매체에 싣기 적합하도록 글과 이미지를 다루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에디터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할 만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마지막 치트키는 바로 편집이었다.
책에서 제안하는 훈련법은 단순하다. 핵심을 알아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요즘의 배경과 목적을 가늠해보는 등 생활에서 재미있게 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책상을 벗어나 일상에서 수시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다. 물론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먼지처럼 쌓여서 나중에 효과를 일으키는 훈련법들이다.
챗GPT가 절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은 뭘까? 답은 금세 나왔다. 챗GPT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입장을 갖지 못한다. 입장이 없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한다. 무엇이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지, 무엇이 신선하고 매력적인지 의미 부여하고 주장하고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이 할 것이다. - p.38
작가가 지난 20년 동안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은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직업적 측면에서 에디토리얼 씽킹은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며 업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코어 근육이 되어주었다. 또 가장 어두운 밑바닥으로 떨어진 순간에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고쳐 써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현실은 똑같은데 그것을 나의 편집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사건으로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한다.
결국 에디토리얼 씽킹의 핵심은 질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내가 지금껏 해온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20년차 에디터가 스스로 답을 적었다. 우리가 잡지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걸 왜 읽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알알이 질문들이 모두 창조적 사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