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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Nov 06. 2024

작은 땅의 야수들



 


순식간에 집어삼켜지는 거대한 이야기에 압도당할 때가 있다. 수세기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참혹과 고통을 말하는 대서사시가 특히 몰입된다. 물론 읽는 내내 불편하고 아프다. 하지만 우리의 아픈 기억과 치유 안 된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되기에 문학으로 들여다본다.  


한국을 관통하는 정서는 한이다. 아프고 억울한 한국인의 역사를 다룬 고통의 서사는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대표작으로 <소년이 온다>를 추천했고, 최근에는 일제강점기의 비극이 담긴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이 러시아 톨스토이 문학상 외국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한국 역사의 비극과 한에 세계가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폭력적 근대화 속에 너덜너덜해진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세계가 알아봐 준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김주혜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배경은 1917년 겨울 평안도 깊은 산속. 극한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싸우며 짐승을 쫓던 사냥꾼이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일본인 장교를 구하게 되는데, 이 만남으로 그들의 삶은 운명처럼 연결되고 반세기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냥꾼, 군인, 기생, 깡패, 학생, 사업가, 혁명가 등 파란만장한 인생들이 인연이라는 끈으로 질기게 얽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수놓는다. 


특히 옥희와 정호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생생하고 극적인 묘사가 아름답다. 옥희는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의 길에 들어선다. 차분하고 수더분한 성격으로 걱정을 사지만, 그만의 지혜로움과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게 되는 인물이다. 기생 견습생이던 시절, 어린 옥희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경성의 한복판 거리에서 무대를 하게 된다. 공연이 절정에 이른 순간, 가득 몰려든 군중을 향해 꽃잎을 흩뿌린다. 그런 옥희를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홀로 경성에 올라온 정호는 가족을 잃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매치기를 하고, 싸움을 겁내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치열한 삶 속, 정호는 옥희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장면들 속에 인물들의 감정이 매우 선명히 느껴진다. 장내의 소란과 분주한 풍경이 일순간 멈추고 얼굴을 스치며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의 감각만을 느끼는 인물이 그려졌다. 마치 옥희와 정호의 사랑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랑이야기인가 싶다가 순식간에 요동치는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3.1 운동을 계획하고, 함께할 것을 설득하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은 땅을 뒤흔들어 놓은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 고난이 반복해 닥치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한다. 그리고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삶의 가치와 용기 앞에 그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야수였다. 


옥희는 오래전 자신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던 밤들을 떠올렸다. 칠흑 같은 어둠은 굶주린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고, 눈 내린 다음 날 아침이면 초가집 둘레를 포위하듯 어슬렁거리다 돌아간 그들의 발자국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야수들은 결코 옥희를 두렵게 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언제나 인간들이었다. - p.513 


김주혜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해 줄곧 미국에서 성장했다. 작가는 한국인 정체성과 언어를 내내 간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시 자신에게 전달한 이야기를 발화해 <작은 땅의 야수들>로 완성했다.  


소설이 탄생한 배경이 재미있는데, 작가가 심한 인종 차별을 경험하고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둔 뒤 고독하게 소설을 쓰던 시절, 여러 편의 단편을 에이전트에게 보냈지만 원하는 답을 받지 못했다. 결국, 에이전트로부터 "장편을 써보라"는 말에 낙심한 작가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함박눈이 내리는 뉴욕의 공원에 갔고, 그곳에서 호랑이와 마주친 사냥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근대사는 고리타분한 역사가 아니라 내 현실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한반도는 왜적을 피로 물리쳤으며, 야수들은 아직 분단되지 않은 남과 북의 영토를 넘나들었다. 구전된 생생한 경험들이 이 소설의 힘이다.  


우리는 현대를 절망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더 막막한 시대,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타심과 용기, 사랑을 잃지 않고 독립을 이뤄냈다. 시대는 여전히 불공평하다. 나쁜 사람이 항상 처벌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이 항상 좋은 결말을 맞지도 않는다. 그게 삶이기도,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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