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속 릴스를 넘겨보며 꺽꺽 웃는 사람들, 릴스는 한국드라마 요약본이다. 여기에는 여지없이 "어머님이라니, 누가 네 어머님이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너 같은 애들 잘 알아. 돈 받고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같은 명대사가 등장한다.
막장드라마의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 표독스러운 중년 여성과, 말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젊은 여성, 그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엄마 왜 그래.”만 연신 외치고 있는 답답한 남자. 여기에 고부사이가 될 뻔 한 여성 둘은 알고 보니 모녀지간이더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더해지면 완벽하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 이 충격적인 서사가 놀랍지 않다. 이미 충분히 예측했던 내용이다. 결말까지 대충 유추 가능하다. 이렇게 뻔히 알만한 내용이면서 다음화를 기다리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욕하기 위해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닐까 짐작한다.
어떤 드라마는 본방보다 댓글이 더 흥미진진하다. 서로 얼굴, 이름조차 모르는 시청자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 한 목소리로 바람피운 주인공을 욕한다. 감정을 공유하면서 쾌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욕하면서 보는 막장드라마의 묘미 아닐까.
웹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하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내용, 무슨 재미로 봐?” 그럼 나는 “소통하는 재미로 보지.”라고 답한다. 웹소설은 태생이 웹 공간에서 다수의 시선을 목표로 탄생했다. 매회 독자 의견이나 별점에 따라 이야기가 조금씩 바뀐다. 자가가 그만큼 독자 목소리에 귀를 열고 있다는 반증이다. 대체로 명작가일수록 필력과 더불어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고별 작가가 쓴 <막장드라마의 제왕>은 익숙할 대로 익숙한 막장 클리셰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지, 막장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방송 제작 PD. 직원들을 착취하는 상사에 대한 분노로 냅다 들이받았다가 제대로 찍히고 만다. 그러다 자동차 사고를 당하며 저승에 간다. 이곳에서 일종의 퀘스트를 받고 과거로 환생하게 된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던 영화감독의 영혼과 함께. 앞으로 1825일 이내에 궁극의 막장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면 당신은 사망한다는 조건이 있다.
주인공은 어떻게든 막장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출생의 비밀은 물론이고 공룡을 등장시키는 것도 모자라 탱크에 우주선까지 끌어다 쓴다. 시청자 90%가 막장이라 여겨야 이 퀘스트를 달성할 수 있다. 전쟁의 기억으로 찾은 막장계의 천재 작가를 발굴해 데려오고, 일부러 엉성하게 촬영해도 이 두 영혼의 능력이 너무 비상했다. 세계 3대 영화제를 싹쓸이했던 영화감독은 막장씬 마저 한 편의 예술로 만들어 버렸고, 배우들의 열연과 탄탄한 대본이 맞물려 어이없는 명작이 탄생하고 만다.
세 번의 잇따른 대성공으로 자신만의 사단을 꾸리게 되었지만 주인공이 열망하는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함께 작업한 명작가, 명배우들을 내친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막장을 만들어야 하는 주인공의 애절함이 극의 재미를 더한다.
막장 드라마는 극의 특성상 온갖 클리셰가 범벅된 형태일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주인공은 막장을 표방하면서 보통 제작자가 생각하지 못할 과감한 전개와 기상천외한 연출을 했다. 이것이 결국 막장이 아닌 명작으로 인정받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다. 본인도 명작을 만들어 놓고 당황한다. 천만 관객으로 명성이 높은 영화감독이 막장 드라마에 도전하자 “흐르는 물에도 위아래가 있고, 무의의 치에도 나름의 법도가 있는 법. 어딜 천만감독 따위가 감히 변덕으로 막장을 운운한단 말입니까?”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정신 나간 전개와 개그로 독자들 시선을 끌어당긴다. 수작 드라마 PD와 명작영화 감독이 머리를 맞대고 소질도 없는 막장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그게 매번 빗나가는 모습이 웃기다. 막장 드라마로 인정받기 위해 엄중하게 임하는 주인공의 자세가 웃기고, 이 험난한 여정에 덩달아 고통 받는 조력자 귀신과의 티키타카, 비교적 평범하게 보였던 인물들이 극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내면의 광기를 드러내는 장면이 우스꽝스럽다.
김치 싸다귀, 배다른 형제, 순도 높은 불륜. 막장은 이제 드라마 필수 요소가 됐다. 과거에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았지만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일종의 마니아 계층이 형성될 정도다.
그러니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당신에게, 웹소설의 단순하고 신선한 '막장 장르'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