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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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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작품 세계는 늘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 그의 웹툰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실사 영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결코 미화되지 않는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책과 영화 모두 '외모'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민낯이 고스란히 비친다.


원작 웹툰은 인간의 외모가 곧 존재 가치와 직결되는 극단적인 사회를 설정한다. 시각 장애인이라는 천형을 이겨내고 도장 가게에서 시작해 캘리그래피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른 저명한 전각 장인 영규와 아들 동환. 30년 전 사망한 여인의 유골이 신시가지 개발 과정에서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동환은 다큐멘터리 PD 수진과 함께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실마리는 어머니가 젊은 시절 일하던 청계천 의류공장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그림자이자 수많은 여공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던 공간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듣게 된다. 얼굴이 지워진 채 모든 사람에게 ‘못생긴 괴물’로만 기억되고 있는 어머니 정영희는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동환은 어머니가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과 폭력을 겪었음을 알게 된다. 성범죄를 저지른 공장 사장에 맞서다 모진 왕따와 구타를 당하고, 믿었던 남편에게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침묵해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한 자신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준 존재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왜 죽였냐고 묻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다 너를 위해서였다. 너한테까지 모멸감을 물려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아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자 아버지는 “기생충 같은 놈, 내가 이룬 걸 받아먹는 기생충”이라고 맞받아친다.


살인자를 고발할 것인가, 아버지를 따라 침묵할 것인가. 고민하다 동환은 결국 스스로 기생충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과거 동네 사진관에서 증명 사진을 찍은 사실을 알아내고 그곳을 찾아간다. 마침내 받아본 어머니의 사진은 놀랍게도 동환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선하고 아름다운 눈빛을 지닌 여인이었다.


안타까운 건 영희 자신조차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어버렸다. 어릴 때부터 못난이 괴물이라고 불린 탓에 추녀 낙인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늘 위축된 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살았다.


원작 웹툰 <얼굴>을 보는 내내 정영희의 얼굴을 상상했다.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끔찍하게 못생겼을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하면서 나 역시 편견에 휘둘린 게 아닐까. 그렇기에 아버지 영규는 한 번도 아내 얼굴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말하자 그대로 믿어버린다. 영규는 평생 모멸당해온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해 장인의 경지까지 올랐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모멸감은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앞을 못 본다고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내 영희는 모멸의 존재였고, 죽임으로서 자신에게서 모멸을 밀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영규와 영희를 조롱했을까. 착하다고 하면서 왜 비웃었을까. 인간은 자신과 다름을 낯설어하는 본능이 있다. 영규는 앞을 보지 못하고, 영희는 외모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이 둘을 괴롭히면서 집단의 우월감을 확보한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얼굴 없는 죽음은 곧 한국 사회의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문화’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온 집단적 망각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얼굴로 평가받고, 얼굴로 기회가 주어진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심지어 얼굴을 바꾸는 것이 인생 반전의 유일한 길처럼 제시된다.


<얼굴>은 한국 사회의 오래된 집착을 정면으로 비춘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정체성을 갉아먹는다. 학벌, 직장, 재산뿐 아니라 얼굴 역시 사회적 계급의 상징이 되어버린 현실을 꼬집는다. 성형이나 외모 지상주의 비판을 넘어,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구조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자연스럽게 자기반성의 자리에 앉게 된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거나,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수십 번 각도를 바꾸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나 역시 타인의 시선을 위해 얼굴을 만들고 살아왔다. 그리고 보이는 모습만으로 상대를 평가해오지 않았나 되돌아본다. 연상호 감독은 얼굴이라는 가장 익숙한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감옥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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