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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09. 2017

달달하고 보드라운 빵의 위로


내 생애 첫 요리는 도넛이었다. 조리대 밑에 디딤판을 놓고서 열심히 반죽을 밀고 주전자 뚜껑으로 찍어냈던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가 끓는 기름에 반죽을 튀겨 주면, 설탕을 범벅하는 작업이 내 담당이었다. 설탕을 사방에 흩뿌리는 바람에 도넛 만든 날은 온 집안이 버석거렸다.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만든 도넛의 맛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밀가루를 튀겼으니까 당연히 맛있었으리라 짐작할 뿐. 반면 우리가 함께 도넛을 만들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변색 없이 그대로다. 이렇게 음식은 입안을 달달하게 적실 뿐만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달달했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달콤했던 시절의 기억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꽤 든든한 밑천이 됐다.  

발라 작가가 쓴 그림에세이 <빵의 위로>(사진)을 보고 잠시 잊고 있었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93가지 빵과 함께 어우러진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를 풀어낸 것 마냥 정감 있다. 포근한 우유식빵은 잠자는 아기의 이불이 되고,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목욕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먹었던 고로케에서는 꼭 춤을 추고 싶은 맛이 난다. 또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전날 냉장고에 넣어둔 초코롤케이크를 한입 넣으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한다. 너무 힘든 날에는 몽롱해질 정도로 진한 초콜릿이 듬뿍 담긴 진득한 브라우니를 뚝 떠서 입에 넣고 시원하게 흰 우유를 들이킨다. 신기하게도 그럼 좀 괜찮아진다.   


빵이 부리는 마법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가끔은 인생의 쓴맛 때문에 삶을 내팽개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달콤함도 공존한다는 사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인생의 달콤한 시절을 놓쳐버리면 너무 아깝겠지? 그런데 당장 가슴저리게 씁쓸해하는 사람에게 언제일지 모를 달콤한 때를 기다리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 이때 가장 빠르고 쉽게 달콤해질 수 있는 수단이 빵이다.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만가지 빵 중에 쓴 빵은 없다. 달거나, 짜거나, 고소한 맛은 있을지언정 쓴맛을 내는 빵은 먹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인생은 쓸지언정 그 인생을 위로하는 빵만큼은 언제나 달콤했다.  


책 곳곳에 숨은 표현들이 재미있다. 단팥과 크림을 사이좋은 자매로 표현한다. “단팥은 단호하지만 마음씨 고운 언니, 크림은 겁 많고 애교도 많은 동생. 나이 차가 제법 나는 단팥 언니는 책임감이 강하고 결단력이 있어서 우유부단한 크림 동생에게 좋은 조언자가 되어준다. 부드럽고 상냥한 크림 동생은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잘대며 단팥 언니는 웃게 만든다.”   


엄마가 제과점에서 빵을 한아름 사오시면 늘 바싹 긴장하고 봉투를 뒤졌다. 우리동네 제과점 아저씨는 팥빵과 크림빵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기 때문에 안에 팥앙금이 들었는지, 커스터드 크림이 들었는지 배를 갈라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팥빵을 고를 확률은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팥빵이라 믿고 집어든 빵이 크림빵이어도 살짝 아쉽기만 할 뿐 먹기 싫지는 않았다. 노르스름한 빵반죽 속에 몸을 숨긴 팥과 크림의 관계는 발라 작가의 말대로 사이좋은 자매가 분명하다. 팥빵만 사면 왠지 모르게 허전해 늘 팥빵, 크림빵을 같이 사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다양한 빵들은 어떻게 이름 붙여진 걸까? 달달한 크림치즈에 쌉싸름한 커피 맛이 조화를 이룬 환상의 디저트 티라미수는 이탈리아어로 “Tirare mi su” “나를 끌어 올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프레첼은 빵을 만들고 남은 반죽을 얇게 밀어 아이들이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은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어원은 라틴어 프레티올라 (Pretiola)에서 비롯됐다. ‘작은 보상’이라는 뜻이다. 예부터 빵은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는 신의 선물이자 항우울제였던 셈이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일일이 감정을 드러내고 악다구니를 질러내고 뒤돌아 서서 후회했던 경험. 그럴 때에는 상큼한 레몬 타르트 한입이면 족하다. 그렇게 우리는 빵 하나로 위로를 받고 잠시나마 설렘의 순간을 경험한다. 나른한 봄날, 달콤한 디저트가 생각나는 때 마음이 달콤해지는 책 <빵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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