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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Oct 10. 2017

사고 후 “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이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사진)는 이렇게 시작한다. 딜런의 엄마는 아들을 키운 17년과 아들을 잃은 뒤 17년의 세월을 하나씩 되짚어 보면서 끊임없이 ‘왜 그랬을까?’를 묻는다. 어떻게든 이유를 알고 싶었고 아들을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친구 집에서 어떤 영화를 보고 노는지 까지 세심하게 챙기던 엄마였지만 정작 아들의 깊은 우울증과 자살 충동은 눈치채지 못했다. 여느 사춘기 아들들이 그렇듯이 딜런 또한 예민해서 그렇겠거니 여긴 게 전부다.   


이쯤 되면 모두가 궁금해진다. ‘엄마는 정말로 아들의 상태를 몰랐던 것일까?’ 침대 밑에 총을 숨겨놓고, 학교를 날려버릴 폭탄까지 제조해 실험했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엄마가 둔한 걸까, 아이가 치밀한 걸까. 사건 이후 엄마는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살던 집을 버리고 도망자처럼 친척집에 숨어 지내면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뉴스에서는 계획적인 살인이었다고 말하는데, 뉴스 속의 딜런은 엄마가 아는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과거에 대해 엄마는 깊이 자책한다.   


한국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로 번역된 이 책은 원래 ‘A Mother’s Reckoning’가 제목이다. 해석하자면 ‘엄마의 회고’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아들을 위한 변명을 적거나 가해자 가족으로서 잃었던 명예를 회복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나도 힘들었노라 울부짖는 내용이 아니라 엄마로서 얼마나 철저히 양육에 실패했는가, 좋은 엄마인줄 알았지만 나는 얼마나 무관심했는가, 그 결과 아들이 어떤 사회적 해악을 끼쳤는가를 자책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본인의 경험을 거울삼아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책임감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어서 빨리 명확한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 그리고 모두가 납득할만한 분명한 원인이 있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어,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왔다거나, 마약중독자 가정에서 본대없이 자라난 잠재적 범죄자였었다는 인과관계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건의 원인이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되지는 않는다.  


현재까지도 그들이 무슨 이유로 같은 학교 친구들을 죽여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정황들을 모아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을지언정 원인을 결코 전부 이해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노력으로도 고통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딜런의 엄마 역시 잘 안다. 그럼에도 엄마는 계속해서 그날의 사건을 복기하고 아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책을 판 수익금은 자살 예방 기금으로 사용한다. 그것이 가해자 엄마로서 세상의 모든 자녀와 엄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부모가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딜런이 어떤 상태인지 부모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딜런은 원래 비밀이 많은 아이고, 자기 내면을 부모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췄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딜런의 심리작용은 심하게 악화돼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리학자 피터 랭먼 박사가 딜런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아무리 엄마라 해도 아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두렵게 생각되는 낯선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나 딸일 수도 있다. 결국 딜런이 왜 그랬는지는 이제 의미를 잃었는지 모르겠다. 무의미한 ‘왜’를 외치기 전에 ‘그랬구나, 힘들었구나’ 한 마디가 더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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