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뒷목육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승은 Dec 04. 2017

오직 "배구" ⑫

나는 스카이워커스 빠의 엄마입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그 언어로만 이야기하는 분과 함께 살고 있다. 

책을 읽어도, 그림을 그려도, 글씨를 써도, 오직 하나로 향한다. 


이를테면, "오늘 간식은 뭐 먹었니?"라고 물으면

"그런데요, 김호철 감독이 엄청 무서워요."라는 동문서답은 기본이고

"지금 엘리베이터 몇 층에 있니?"라고 물으면

"문성민 층이에요. 이제 최민호 층이에요."라는 심화된 답변도 한다. 

내가 문성민 백넘버가 몇 번인지 최민호가 몇 번인지까지 알고 살아야 하나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아이를 보고 주변에서 위로라고 해 주는 말이 

무언가에 이렇게 깊숙이 빠질 수 있는 아이가 나중에는 성공할 거라고 한다. 

나중엔 그럴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깝깝하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도 까리한 넘이 문성민이 누구랑 대학 동기인지, 

키가 몇인지 줄줄 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성민을 만나면 이 아들을 손에 쥐여 주며

"그냥 그 집 아들 하세요."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아이의 이런 성향이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앞으로 좋아진다고 하니 희망을 가져 보려고 한다. 


7세, 2013년 1월에 우연히 생긴 배구 경기 공짜표가 시작이었다. 

9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최천식, 마낙길을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배구장에 가 본 이후로는 

이 세상에 아직 배구라는 구기 종목이 남아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날 이후로 일 년 중 긴 팔 입는 계절은 모든 대화가 배구로 시작해서 배구로 끝났다. 


구몬 푸는 줄 알았는데 끝까지 선수 번호만 써 놓으셨다. 

나는 그제야 문성민이 15번, 최민호가 11번, 송준호가 8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송준호 층에 산다는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정도는 귀여웠다. 

 



8세에는 배구를 보는 것에서 모자라서 직접 배구를 하시다가 팔에 염좌가 생겼다. 

얼마나 무식하게 열심히 했으면...

한의원 치료를 받고 수영을 쉬게 됐다. 동생이 수영 레슨을 받으러 들어간 사이

그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배구혼을 불태우신다. 


배구 이야기 

아가미를 탓을 하는 돌호철: 김호철 감독이 아가메즈 탓을 했었나? 


: 케릭터를 좋아한다.

:(빙)수가 먹구싶다. 


:송하지를 탔다

:(중)지한다

:호랑이다


참, 아이스럽다. 



드디어 그렇게 좋아하는 문성민 선수와 최민호 선수를 만났다. 

쑥스러움은 어디 가고 너무 좋아 입이 씰룩씰룩


매일 바뀌는 순위를 적고 또 적고 그렇게 버린 종이들도 수두룩하지만 

이 스케치북 하나는 남겨놨다. 차마 다 짊어지고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스케치북을 넘기며 아이가 이 짓(?)을 하느라 꼬물락거렸을 시간을 생각하니 

이 엄마는 혀를 끌끌 차지만 현대캐피털 선수들이 한 번쯤을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배구 경기를 정리하고 쓰고도 시간이 남으면

이런 것도 만든다. 


아들의 오타쿠 기질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뒷목을 잡지만 이런 집요함으로 뭔가 하나 해 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요즘은 공부가 다는 아닌 세상이니깐... ㅠㅠ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 ⑪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