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도 호재를 생각하는 나
비가 오는 일요일이었다. 아침 9시가 넘었는데 밖은 새벽처럼 침침하고 빗소리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무거웠다. 그날 해가 쨍하고 났으면 안 그랬을까? 가뜩이나 날씨도 눅눅한데 아이들도 몸이 무거운지 각자 방에서 늘어져 있고, 지난밤 밤손님이라도 다녀가신 거 마냥 거실엔 온갖 과자 껍질들과 벗어놓은 옷가지들 잡동사니들, 또 설거지통에는 한가득 다시 나온 물컵들... 이 아침은 나에게도 똑같은 일요일 아침인데 이건 뭔지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불공평하니 뭐니 그런 생각은 주제 넘은 생각이었나. 아, 진짜 설거지를 다 해 놓고 잤는데 밤새 뭔 설거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냐, 물컵이 일회용이냐, 혼자 구시렁거리며 설거지를 툭툭 던지면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등 뒤에서 고성이 오고 가고 진짜 이거야말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와) 어이없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설거지물 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설거지에 몰입했던 것일까. 사건의 스파크가 튈 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별거 아닌 일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던 거 같다. 중2 아들의 삶에 대한 안일한(?)태도를 바로잡기 위해 4학년 9반 아버지가 훈육의 미덕을 보이셨고 그의 아들은 더 이상 아버지의 쓴소리를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순종의 터널은 이미 지나간지 오래였는데 다만 그의 아버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들은 아들이고 남편은 무슨 이유로 중2랑 맞짱을 뜨려고 했을까. 그 기백이 남다르다고나 해야 할까? 그냥 대충 눈 감아주고 말지.
그 순간 나는 미친 속도로 고무장갑을 벗어젖히고 (이상하게 또 바쁠 땐 잘 안 벗겨지는 고무장갑) 거실로 달려가 둘을 말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상황 파악에 나섰다. 상황을 들여다 보니 이것은 교육이라고 하기에도 훈육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말로만 듣던 사춘기 vs. 갱년기의 격돌인거 같기도 하고 아니며 그저 흔한 수컷들의 힘겨루기인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콕 집어서 말 할 수는 없지만 당시 나의 솔루션은 둘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는 계속 왔다. 추적추적. 젠장 설거지도 다 못했다. 뒤집어 나자빠진 고무장갑은 꼭 나 같았다. 집안 분위기는 진짜 망이고 아무리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 지만 우리 집 중2는 방에 들어가 흐느끼며 운다. 훈육의 전후 사정, 그딴 거는 필요 없고 엄마는 또 엄마인지라. 아들 우는소리에 마음이 찢어지고 괜히 남편이 밉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이 있는거고 현재는 두 마리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여보 나가자. 애들 그냥 두고 우리끼리 나가."
세수만 겨우하고 차 키를 들고 남편 등을 떠밀어 시동을 걸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남편도 마음이 많이 상했다. 세상 누구보다 아들 바보인데 내 집에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찍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거다. 내가 이러려고 아빠가 됐나, 자괴감이 들고 했을꺼다. 운전대를 잡고서야 전후 사정을 들었는데 (역시 기억이 안 나고) 그저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사춘기 아들을 논리적인 말로 설득하면 잘 받아드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충고를 했는데 아이의 태도가 기분이 나빴고 등등 그 이후로는 집집마다 다 똑같은 그 내용이었다.
"여보, 지금은 말이 안 통해. 그냥 좀 지켜봐."
"나온 김에 드라이브나 하고 마누라 맛있는 커피나 사줘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달렸다. 고속도로를 타자니 너무 늦게 집에 돌아올까 봐 걱정이 돼서 고작 동네를 뱅글뱅글 돌았다. 인스타그램으로 천안 근교에 있는 카페를 찾다가 성환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았다. 예전에 주인장의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목장을 지금은 두 아드님이 멋진 카페를 만들어서 나름 핫플이 되어 있는 곳이었다. 나무 좋아하시는 분이 지금 기분이 안 좋으시고, 코로나 때문에 밖에서 마시는 게 좋을 테니 이곳이 제격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수 많은 광고를 감안하여 네이버에 다시 한번 더블 체크하기로 했다. 기분 안 좋으신분을 또 안 좋은데 모시고 가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깐.
그런데, "성환 카페"를 검색했는데 네이버에 줄줄이 나오는 검색어들은 "성환 종축장 이전", "BIT 산업단지 분양" 이런 내용들이었다. 천안에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성환을 가 본 적이 없고 천안은 이미 조정 대상 지역이라 비 조정 지역인 아산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안 안에서도 읍, 면 지역은 조정 대상 지역이 아니라고 하니 이게 무슨 하늘의 뜻인가. 너는 나의 운명인가.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땅에 대한 호재가 눈에 들어 온 순간 갑자기 비가 그치고 해가 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나는 너무 속물일까? 또 그런 기분을 이렇게 활자화 해 버리는 나는 너무 솔직한 사람일까? 아무튼 남편의 속상함과 아들의 흐느낌은 일단 집에 돌아가서 어루만지기로 하고 나의 발길은 성환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아주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