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때문인지, 추억 때문인지.
입에 위장약을 털어넣으며 꾸역꾸역 바깥음식을 먹었던 지난 6일을 회개하며 죽으로 요양하는 일요일 하루를 보냈다. 나이가 들 수록 식탐이 없어지는 것은 왜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무게 숫자가 좀처럼 줄지않는 것은 왜인지 슬픈 의문을 갖게 된지는 꽤 오래됐지만, 오늘만큼은 스무살 그 언저리의 입맛을 다시 회복한 듯 먹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 잔뜩 떠올려보았다.
그 속에는 가장 최근에 먹었던 통삼겹살도 있었고, 17년도에 스페인에서 사왔던 뚜론도 있었으며, 손을 뻗으면 당장 닿을 메밀 비빔면도 있었다. 아, 얼마 전에 먹고는 '아, 별로다.'하고 실망했던 이삭토스트도 있었다!
일례로 예전에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낸 후 예약해놓은 식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참 맛있었던 어란 파스타가 남자친구에게는 최악의 음식으로 남아있는걸 보면, 음식에 감정을 덜어내기란 영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맛은 전부 '나만' 알고 있을 수도 있는 맛이 아닌가, 라는, 두 가지 의문을 아울러 얻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비'와 관련한 음식이 많은 듯 한데,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매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장마철이 있고, 비 오는 날은 보통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니, 그 시간동안 소중한 사람들과 여러가지 음식을 해먹으며 그에 관련한 추억이 쌓인 것이 이유가 아닌가 싶다. 올해도 마찬가지. 연이은 비소식으로 지금은 그로 인한 피해를 걱정할 단계에 이르렀지만, 심각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비가 오니 부침개를 해먹자' '비가 오니 막걸리를 먹자'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비가 오자 부침가루의 매출이 늘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과연 먹보의 민족 답다.
나와 같은 경우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은 바로 냉면이다. 그것도 집에서 엄마가 해준 물냉면. 어렸을 적부터 나의 어머니는 여름철만 되면 냉면을 대용량으로 사놓으셨고, 우리 가족은 여름 내내 그 많은 냉면을 소진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레시피는 별거 없고 그냥 면을 끓여서 시판 물냉면 육수를 붓고 오이를 얹는게 다였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게 정말 맛있었다. 엄마는 항상 무슨 할말이 그리 많았는지, 식탁에 엄마와 둘이 앉아 냉면을 먹고 있노라면 엄마의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그러면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asmr 삼아 묵묵하게 냉면을 먹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같이 식사를 하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그렇게 나누는 시간도 함께 줄어들었는데도 이상하게 여름만 되면 그 식탁의 풍경과 함께 물냉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올 여름, 장마철이 찾아왔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냉면 먹을까?" 하고.
사실 우리가 그 음식을 먹으면서 쌓은 추억과 인연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 아닐까. 비오는 날에 부침개를 부쳐먹으며 가족들과 담소를 나눴던 기억,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친구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고 싶어서 날씨를 핑계로 먹자는 제안을 하게되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장마철에 엄마랑 먹었던 별거 없는 냉면이, 나에게는 여느 유명한 냉면집의 것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추억 보정에 힘입어 실제 맛보다 고평가된 음식이 여러분에게 있을 지도.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내게 맛있으면 그만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