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가계도(career genogram)
벌써 8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30살의 한 청년이 진로 고민이 있다며 나를 찾아왔다.
그때 그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공무원 시험을 6년간 응시했으나 결과는 탈락이라는 것이다.
수험생 생활도 너무 힘들고 공부하는데 너무 많은 돈을 쓴 것 같아 부모님께 죄송하여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다른 일을 알아보고자 한다는데....이미 마음을 정하고 상담실에 온 것 같아 그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저는 제가 시험준비를 한지 3년쯤 지났을 때 이 시험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거기서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서 아는 형님이 일자리가 있다고 같이 일하자고도 해서 그럴까 하는 마음도 많이 있었지만 부모님께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농사짓는 부모님은 '나라 일'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너무도 보고 싶어 하셔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동안에는 진짜 농담 아니고 집에 소도 파셨거든요. 제가 시험공부를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말을 하면 너무 실망하실 것 같아서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계속 공부한다고......말했어요.”
그는 그렇게 6년간의 시간을 보냈고 딱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내 앞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날의 대화는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언젠가는 그 친구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였는데 무려 8년이나 흐르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든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자식이 나라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부모의 열망과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는 자식의 입장.
그리고 수험생활 3년차에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란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더 해야만 했던 그 청년의 삶까지....그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가'를 물었을 때...
그 청년은 많이 정리된 상태인 듯, 이제는 제가 솔직히 말씀을 드리야 될 시점이라고 하면서 용기를 내어 웃었다.
무척 선한 미소와 따뜻한 심성을 가진 청년.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고픈 마음과 함께, 내 길이 아니라는 느낌 사이에서 얼마나 힘겨웠을까 묻지 않아도 그 시간들의 갈등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떤 선택이든 응원하고 그의 선택을 지지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그 상황이었다면 나라도 그랬을 거다.
아마도 너의 마음이 그 시간을 견디게 했겠지...
흘러버린 시간이 무척 아깝지만 나였다고 해도 꺼내놓고 말하기란 쉽지 않았을것이라 생각되었다.
몇 년이 흘러 그 친구의 이야기가 희미해져 갈 때쯤 모 대학에서 상담을 할 때 또 한명의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 저는 지난 3년간 휴학을 했어요. 회계사 시험 공부를 했는데 잘 안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취업하려구요. 그런데....“
그는 말을 흐리고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3년간 공부를 해왔고 복학을 고민하고 있는 친구였지만 왠지 아직도 해결된 것이 없어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저는 외동이고 아빠를 정말 존경해요. 어린시절 아빠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아빠 회사에도 가보면 모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아보였어요. 제가 시험에 도전한 이유는 ......아버지가 회계사세요.
그래서 저도 관련 학과에 왔고 아빠처럼 회계사가 되려고 일찍 휴학을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잘 안되었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그런데 안되었어요.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요.......아빠가 이제는 그만하라고 하셨는데........회계사 아니라도 괜찮다고 그러셨는데......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리곤 그 학생은 30분 내내 우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떤 서러움이 밀려온 걸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을 자책하는 걸까? 흘러버린 시간을 아쉬워 하는 걸까? 결국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괴로움일까? 이제는 괜찮으니 그만하라는 아버지의 사랑때문일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일 것이겠지.
우는 그 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원하는거니?
그래서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니?
그는 생각해 보겠다며 떠났다.
그리고 한주쯤이 지났을 때 긴긴 장문의 글을 받게 되었다.
그의 결론은 다시 공부를 재도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부터 꿈꿔왔던 일이고 존경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은 그가 3년간의 휴학을 한 지금에도, 시험을 연거푸 떨어진 상황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래.
그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들과의 만남은 이후 내가 진로상담을 할 때, 더 많이 가족의 관계와 영향을 살피도록 만들어 주었고 특히 진로상담에서 가족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해서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해 주었다.
현장에서 가족의 영향에 대한 압력과 기대 그리고 가족이 부여한 직업의 가치가 개인의 진로선택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임상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갈수록 이러한 가족의 역동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게 되었다.
진로상담과정에서 특히 어린 학생들과의 진로상담 중에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 맘에로 하라” 라는 메시지를 담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인생은 우리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감하게 다루어주어야 할 단계들이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만 한다.
다짜고짜 네 인생은 너 것이니까 부모 말 들을 필요없다는 식의 상담은 매우 위험하다. (그것이 비록 옳은 조언이라고 해도 우리는 맥락속의 개인이라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
이러한 체계론적 접근은 최근 들어 진로이론의 생태학적 접근으로 많이 소개되었다.
2009년 국제 워크샵에서 뵈었던 진로상담의 대가이신 헤프너 교수님도 이러한 생태학적 접근의 이론가이고 우리가 환경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를 예민하게 평가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모델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족치료의 선구자들을 만나게된다. 그들은 인간이 사회적 맥락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우리의 행동이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무엇이 아내로 하여금 자기 삶은 제쳐두고 자녀의 삶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가족 속에서 특히 선망의 직업으로 등장하는 직업은 무엇인가? 터부시 되는 직업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가족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가치관은 어떻게 다른가?
머레이 보웬은 확대된 가족 관계의 망을 통해 가족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 학자이다. 보웬 학파의 치료는 가족이 당면한 문제를 정확한 사정(assessment) 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현재 야기되고 있는 문제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보웬 학파에서 가계도 (genogram)는 보통 3세대 이상의 가족구성원과 그들의 관계를 열거한 도표이다. McGoldrick와 Gerson 에 의해 최초로 개발된 가계도는 현재 심리학, 사회복지, 의료 및 상담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가족상담 분야에서 가계도는 내담자 가족의 역동과 유형을 파악하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한 개인은 어린 시절 가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최초의 사회화 과정을 경험하고 이 과정을 통해 대인관계의 기초 기술을 습득하게 되는데 가족과의 경험을 통해 얻은 생활방식은 그 개인이 성인이 된 후에도 삶의 중요한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고 보았다.
가계도에는 연령, 결혼한 날짜, 사망, 지리적 위치를 표시한다. 남자는 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여자는 원으로 표시하며 그 안에 나이를 적는다. 수평선은 결혼한 부부 사이를 가리키며, 선위에 결혼한 날짜를 적는다. 수직선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가리킨다.
가계도가 가족 역사에 대한 정적인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을 갈등관계, 단절, 삼각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사망, 결혼, 이혼과 같은 주요 사건은 날짜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건은 가족 전체에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켜 대화 채널이 열려 접촉을 늘리거나 아니면 이러한 문제가 쌓여 점차 단절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계도에서 또 하나 주요한 정보는 가족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날짜, 관계, 주거지는 정서적 경계, 융합, 단절, 심각한 갈등, 개방의 정도, 가족의 현재 및 앞으로 맺게 될 관계의 수 등을 탐색하는 틀이 된다.
세 줄로 된 선은 지극히 가까운 관계(또는 융합된), 지그재그로 된 선은 갈등, 점선은 정서적 거리, 마지막으로 중간에 단절된 선은 관계가 소원하거나 단절된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상담자가 가족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가족이 처한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간과하기 쉽다.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현재 가족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와 여기에 대한 대처 방법이다. 이러한 정보는 가족이 겪고 있는 만성적 불안의 강도를 평가하고, 이것이 가족의 어려운 생활 사건에 과중한 부담을 주거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계도를 통해 가족의 정보를 수집할 때, 상담자는 가계에서 어떤 사람이 현재 평가 대상의 가족에게 가장 많이 연루 되어 있는지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관여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접촉이 단절된 사람도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보다 더 큰 불안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체계 이론은 개인에게 미치는 부모의 영향을 체제이론에 바탕을 두어 설명한다. (Gladding, 2006). 이 이론에 따르면 한 개인의 행동은 개인을 둘러싼 가족 구성원의 의사소통방식, 상호작용의 패턴, 심리적 거리감, 구성원의 독립심, 구성원간의 일체감등으로 구성된 체제적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Super의 발달이론과 Roe의 욕구이론은 일관되게 학생이 부모와 형성하는 관계의 질이 진로 인식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가족 체제 이론은 그 관계를 가족이라는 한 체제에서 개인이 어떻게 경험하는지, 체제적 관점에서 관계를 정의한다. 이러한 접근은 관계의 질을 맥락적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학생이 가족들의 직업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은 가족 구성원들의 특징과 함께 인식되기 때문에 직업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주관적 편견이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가계도를 바탕으로 위와 같은 관계적 특징들을 탐색하는 활동은 학생의 진로상담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가계도를 학생들의 진로상담에 활용하는 접근은 Okiishi(1987) 가 최초로 소개하였다. 이후 몇몇 저자들이 진로상담의 한 기법으로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최근에 발표된 일련의 연구들은 이 방법을 효과적인 상담기법으로 제시하였다. (Brown & Brooks, 1991; Penik, 2000; Sharf 2005). 가계도를 활용한 진로상담 접근은 일관되게 학생들이 가계도를 탐색하면서 자신들의 진로 인식과 진로결정에 미친 가족의 영향력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Gibson, 2005; Malott & Magnuson, 2004; Thorngren & Feit, 2001) .
가계도를 통한 진로 탐색에서는 가족이 일과 직업에 대해 어떤 기대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탐색하는 것은 진로상담에서 매우 중요하다.
Gottfredson(2002) 은 학생이 진로인식을 계발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학생을 둘러싼 주변인의 기대와 인식, 그리고 주변 환경의 문화적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또한 다른 직업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족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교류되며 학생은 그 과정 속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가족의 일과 가치관을 묻는 일련의 질문들은 이처럼 학생의 진로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만한 가족들의 일과 직업에 대한 인식을 탐색하도록 돕는다.
일과 직업에 대한 가치관은 직업 선호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부모는 학생들의 진로인식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특히 학생들의 역할 모델로서 결정적 영향을 준다. (Wahl & Blackhurst, 2000). 따라서 학생이 좋아하는 직업을 탐색할 때 학생의 인식과 결정에 영향을 준 가족적 요인들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은 중요한 절차이다.
Gottfredson의 직업포부 이론에 의하면 문화적 요인에 의해 어린 시절 형성되는 직업에 대한 인식은 이후 진로 결정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개인이 사회 문화적 기대와 어긋나는 진로결정을 할 때 도전을 받기 때문에 진로상담자는 이와 같은 사회 문화적 기대가 학생의 진로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파악하고 이를 학생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진로상담의 목표로 보았다. (출처: 오인수(2008). 초등교육연구 Vol12, No2)
최근 부모대상의 진로특강을 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는 알파고의 시대이니 이공계로 가는 게 맞는데(?) 아이가 만화를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림그려서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러한 질문이 나올때 진로상담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
가족 속에 담긴 진로가치관은 생각보다 매우 힘이 쎄다.
특히 의사결정의 권한을 어느 한 사람이 갖고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가족의 체계 속에서는 진로탐색의 활동은 극도로 제한될 가능성이 있고 탐색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한쪽으로 편중되기가 쉽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는 [타인의 기대]가 앞서기 쉽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부분은 보웬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족 분화의 개념으로 다시 한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로상담은 가족관계의 역동과 상호작용을 통한 포괄적인 시야를 겸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맥락속의 개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