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10]
어릴 때 책을 통해 고전 명화들을 처음 접하기 시작하면서 누드화를 보게 되었다. 처음 누드화를 봤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옷을 벗고 있는 모델도, 그 모델을 그리는 화가도, 그리고 그가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보는 사람도 모두 부끄럽지 않나? 라는 물음이 들었고, 조금 더 커서 동네 목욕탕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나체와 그림 속 나체는 달랐다, 한편 누드화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진지하게 감상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흥미로웠는데, 어머니께서 아이돌 무대를 봤을 때와 명화 속 누드를 보았을 때의 다른 반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TV속 여성 케이팝 가수들이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민망한 춤을 추는 것을 우연히 보시고는 매우 불편해했다. 그런데 반면 누드화를 볼 때에는 오히려 감상자의 태도로 설정을 바꾸어 누드를 완전히 미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누드화를 소비하는 태도에 늘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중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게 되었다. 존 버거가 이 책의 3장에서 누드화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누드화에 어떤 욕망을 집어넣었는지, 또 섹슈얼리티 소비를 어떻게 정당화하였는지를 알아보고 비판하고자 한다.
존 버거 이전에, 왜 누드화의 존재 이유는 비판적으로 고려된 적 없는가? 그것은 누드화가 권력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특히 여성 누드는 남성의 성적 욕구 만족을 위해 그려지고 정당화되었다. 때문에 이 사실을 안다면 기존의 방식으로 누드화를 소비해서는 안 된다. 기득권층의 욕망에 의해 누드화에는 고상한 미술의 베일이 씌워졌는데, 크게 다음 세 가지의 베일이 씌워졌다.
1) 허구적 인물
“누드화의 전통에서 최초의 누드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것이다.”(존 버거, 56쪽). 전통 누드화 속 인물들은 대개 신화나 성경 속 인물이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회화 속에서 프레임 밖 관람객을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에서처럼 관객에게 자신의 누드가 보여지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고, <수잔나와 장로들>에서처럼 자신을 훔쳐보는 관객 무리에 합류하기도 한다. 또는 <파리스의 심판>에서처럼 미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가상의 인물들이다. 당시 주 관람층이었던 중산층 남성들은 이와 같은 종교화, 신화화를 감상하며 자신이 교양인임을 암암리에 드러낼 수 있었고, 동시에 그것들이 누드로 그려졌기에 내밀한 성적 욕구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현실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적 욕구를 누드화로 해소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2) 공적 장소에 전시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64쪽).
관람객이 더욱 떳떳하게 누드를 소비할 수 있게 하는 요소에는 대상이 허구적 인물인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시되는 공간이 공적 장소라는 점도 있다. 성당 건축물과 같은 종교 기관이든, 화이트큐브든, 아니면 당대 살롱과 같은 전시 공간이든, 회화가 걸리는 곳은 개인적인 곳이 아니다. 다수가 볼 수 있고, 현대로 올수록 그 다수는 불특정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누드는 개인의 육체로부터 파생된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곳으로 나오면서 그림 속 모델의 인간성은 지워지고 대상이 되어 공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물을 누드로 바꿔 사진 속 구경거리가 된 벌거벗은 육체와 함께 관객까지도 일반화시키고, 섹슈얼리티를 개별적이거나 특정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써 욕망을 환상으로 바꾸는 것”(72쪽)은 비단 사진가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3) 여성
누드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에서 짚은 누드화 속 대상들이 여성이며 누드화의 소비자가 남성이라는 부분에 있다. “누드를 그린 보통의 유럽 유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며, 남자로 상정된다.”(존 버거, 64쪽). 누드화는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56쪽)는 오래된 관습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관습을 널리 보급하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누드화에 담긴 섹슈얼리티와 기득권층의 욕망으로 인해 여성은 자신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내면화하게 되고, 남성은 자신들의 보는 방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
마네의 <올랭피아> 이후 “누드의 이상은 깨졌다.”(76쪽). 그리고 지금까지도 깨지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누드화를 보는 방식 또한 변해야 한다. 아니, 발가벗은 신체를 누드화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존 버거는 “예외적인 누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관람객의 관점이 아닌, 화가의 주관적 관점으로 그려진 벌거벗은 그림을 칭한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누드”마저도 결국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 그림“(68쪽)이라는 한계가 있다. ”예외적인 누드“에서 신체를 이상화하거나 관능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을지라도 여성이 수동적 위치를 점하는 것은 기존의 누드와 다르지 않다.
다르게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여성을 보는 방식을 전복할 때 누드가, 여성의 몸이 섹슈얼리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존 버거(2012), 최민 역, 『다른 방식으로 보기』,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