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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Feb 26. 2021

전시 후기 : 친애하는 공포에게

[A모 12]

*sm 플레이, 항문 성교 등 성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때때로 어느 사람, 어느 공간에 매료될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엔 아주 날 것의 공간, 예를 들면 공사 중인 건물의 폐허 같은 잔해라던가, 오래된 주황빛 조명이 으스스한 어느 골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편이다. 더러울법한 폐허에는 그 나름의 생명력이 있어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휩쓰는 중인 허름한 을지로 ‘힙플레이스’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까닭도 여기 있지 않을까. 그 연장 선상으로, 날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아웃 사이트’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물론 전시장이니만큼 누군가의 관심과 정돈이 있겠지만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여타 미술관, 박물관에 비해 ‘아웃 사이트’는 꽤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웃 사이트’에서 지난 1월에 종료된 허니듀의 개인전 <친애하는 공포에게>는 경계와 금기, 쾌락에 대한 이야기다. 이 전시가 공간과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비현실-현실 또는 낙원-황야를 대비시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 이 날 것의 반지하 공간과 어우러져 꽤 강렬한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기 위해 네이버에 게시된 전시 소개글을 일부 발췌한다.) '삶과 현실을 유지시키는 질서는 금기의 힘으로 존재해왔다. 경계 바깥은 질서로 통제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 낙원의 바깥은 공포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위반할 시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의 고통이 이제는 더 많은 쾌락의 조건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허니듀의 개인전 <친애하는 공포에게>는 안락함 너머 공포에 대한 탐구로 자전적 경험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서 작가는 경계 밖의 부정함 속에서 자신을 마주한다.'


주택가 사이에 은밀히 위치한 이 철문의 뒤, 휘황한 오페라 빛 조명 아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이 놓여있다. 나체의 뒷모습과 항문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영상 뒤엔 신체를 구속하는 각종 도구들로 장식한 철조망이 단단히 놓여 있고, 그 뒤로는 미끈한 라텍스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라텍스 밑의 물체에 흡착한다. (당신이 sm플레이에 관심이 없다면)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고 그 용도가 모호한 오브제들의 향연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 편 무언가 위험하다는 레이더를 작동시킨다. 전시장에 설치된 ‘예술품’의 권위는 관객을 조용히 기다리는듯하나, 사실은 공포를 느끼길, 안심의 끝자락에 들러붙은 찝찝함을 의식하길 바라는듯하다.  

진정한 포스트휴먼이 되는 방법, 2020, 스테인레스 강, 단채널 영상, 4’50”

철창 바깥에서 재생되는 영상은 어디선가 들어본 철학적인 용어로 장황히 논리를 전개한다. 허니듀는 '낙원'과 '황야'의 경계에 자리 잡아 낙원의 지루한 안락함을 즐기는 인간을 아주 원초적인 이미지들로 현혹시킨다. 오롯이 성적인 쾌락만을 위해 질서 바깥의 폭력과 학대를 교묘히 가져와 허용 가능한 극단의 지점까지 목을 죄고 신체를 압박한다. 라텍스가 흡착되며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알 수 없는 형체는 위화감을 조성하며, 이를 물리적으로 차단한 철창 밖의 관객은 공포와 맞닿은 쾌락의 경계에서 관조의 안전함을 의식한다.


관객의 안전함은 한차례 차단된 철창 뒤의 위치와 더불어, '다름'에 기인하기도 한다. 영상과 전시 전반에 드러나는 사도마조히즘 취향은 전시장 밖 현실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것으로, 관객을 경악하게 만드는 한 편 역설적으로 경계 바깥에 있다는 안도를 가져온다. 한 발짝 뒤에서 관망하고 있다는 감각이 몰입을 한 단계 차단하며 태연함을 유지하길 종용한다.


허니듀는 안심하고 있는 관객을 경계에서 흔들다가 불현듯 황야-안전한 에덴동산의 바깥 혹은 에덴동산에 꾸며진-에 내던진다. 또 다른 철문 너머, 빛 하나 안 드는 두 번째 공간은 자동차 라이트 오브제의 존재만 희미하게 드러나며 나레이션으로만 진행된다. 공간에 들어서면, 한 남성이 sm플레이를 위해 낯선 사람을 만나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극한의 공포와 쾌락을 느꼈다는 나레이션이 들린다. 남성은 극한 상황의 공포 속에서 자신이 '오브젝트'로 취급됨에 극한의 쾌락을 느끼고, 플레이가 끝난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공간 자체가, 그리고 나레이션의 내용이 금지된 욕망의 시뮬라크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황야에 내던져진 것이 아닌, 황야의 고통을 에덴동산에 교묘히 꾸며냈기에 그 고통이 쾌락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트렁크에 갇힌 남성은 쾌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안전을 담보로 삼아 극한의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이 쾌락은 일전에 만났던 사람에 의해, 나름의 상호 합의로 이루어진 ‘플레이’였기에 가능했다. 이 남성과 비교하여 나는 상대적으로 전시장이란 아주 안전한 공간에서 간접 체험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꼈던 쾌락에 몰입할 수 없었다. 내가 트렁크 속 남성보다 실제로 어느 트렁크에서 죽어간 수많은 익명의 누군가에 더 이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물건으로 다루어진다는 쾌락이 낙원 속에 꾸며진 황야의 고통에서 비롯된, 최소한의 담보가 보장된 시뮬라크라였다면 이 시뮬라크라의 원형은 실제 현실-‘진짜’ 황야-에서 죽어간 누군가의 ‘진짜’ 공포가 아니었을까. 나의 현실에 맞닿은 공포가 누군가에겐 돈을 주어서라도 사고 싶은 쾌락이 된다는 모멸감에 나는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나보다.


질서를 위반함에서 오는 공포는 야누스의 양면처럼 쾌락과 맞붙어 있다. 전시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sm플레이 역시, 나에겐 위험한 금기이지만 누군가에겐 이미 시시한 쾌락일 수도 있다. 어릴 적 엄마의 눈을 피해 먹었던 사탕이 유난히 달았던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더 큰 질서를 들키지 않게 위반하며 그 끝에 찾아오는 위험한 쾌락에 서서히 중독되어 더 큰 쾌락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쾌락이 영원하기만 할까? 금기를 넘어선 쾌락의 끝에 친애할 수 없는 ‘진짜’ 공포가 현실에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전시를 보고 한동안 내가 좋아했던 이 공간에 펼쳐진 전시가 나에게 주었던 여러 감정을 반추했다. 그 감정의 원인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 꽤 길었던 것 같다. 괜한 상념에 이런저런 이론서를 찾아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던 이 전시를 그만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야지 싶다. 더 재미있는 전시로 다시 아웃 사이트를 찾을 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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