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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e우먼 Jun 16. 2023

물 만난 도마뱀과 트랜카디스

스페인 한 달 살기 04 sustainable 

한 달 살기는 삶에 대한 도전이며, 휴가가 아닌 일상이라는 점부터 단디(?)하자. 비행 일정이 잡히면 동네를 정해 집과 차를 빌리고 한 달 치 짐가방을 챙겨야 한다. 이국의 식재료와 낯선 도구로 밥을 지어먹으며 세탁기를 돌리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천차만별 가이드로 막연했던 예산은 매일밤 남편과 온라인으로 주고받은 인보이스와 종이 영수증을 엑셀에 적어가면서 파악했다. 귀국 후 디파짓 승인취소 건을 일일이 체크하며 현지에서 쓴 카드 내역을 보태고 나서야 비로소 전체 스케일을 파악했다(wow). 뒤바뀐 시차로 헤롱 데던 날이 족히 한 달은 되었던 것 같다. '출국 전 - 현지 한 달 - 귀국' 구간을 도합 한 약 100일 정도가 '한 달 살기' 여정의 사정권에 들며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오늘은 우리 삶에 던져진 쓰디쓴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만드는 비법에 대한 이야기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던 나는 한 달 반 전, 남편과 딸의 손을 붙잡고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느리고 꿈같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지 54일이 지났다.





삶이 네게 쓴 레몬을 건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스페인에 도착한 지 열흘 정도 지나니 모든 것이 느려졌다. 빠르게 흐르던 한국의 시간들이 생각났다. 뒤쳐진다는 압박과 쉴 새 없이 공명하던 나의 잿빛도시 서울. 애달프고 묘한 감정이었다. 한 달 살기를 통한 물리적 거리감은 렌즈를 바꿔 낀 카메라처럼 기존의 세계를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고민의 정점이던 문제를 저만치 페이드 아웃 시켜 주는가 하면, 잊고 있던 중요한 것들이 불현듯 줌인된다. 

덕분에 몰스킨 다이어리가 여러 장 채워졌다. 내 경우, 매출을 올려야 하는 자본주의 '액셀'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회적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 자주 시동이 멈추는 게 문제였다. 좋은 세상을 꿈꾸며 선한 영향력을 외치던 나와 백화점 나들이와 명품을 애정하는 나란 녀석(?) 사이에서 괴리감도 자주 느꼈다. 100년 전 기획된 가우디의 작품들이 오늘날 스페인을 먹여 살리는 '레모네이드'라면 유난히 굴곡진 그의 삶에서는 쓴 레몬맛이 난다. 고집불통 외골수, 유토피아를 꿈꾸며 신을 위해 헌신하다 사고로 떠난 천재 건축가 가우디. 이런 그의 삶은 불행일까, 축복일까. 우리는 그 삶의 여정 중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까.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스페인 남부 




트랜카디스 Trencadis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설렘 가득 카피와 달리 우리 부부는 많이 부딪혔다. 잘못 구운 도자기처럼 뒤틀린 마음이 자주 갈라지고 벌어졌다. 다른 환경에서 정반대로 살던 유약한 어른들의 민낯을 아이에게 자주 들켰다. 철없는 둘 사이를 오가며 웃음과 생기를 더해준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을 것 같다. 바르셀로나의 어느 날 구엘 공원의 핵인싸, 도마뱀을 만났다. 그리고 트랜카디스.  

구엘공원 전경


트랜카디스란, 깨진 타일과 유리 조각을 붙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드는 이슬람의 타일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기법을 사랑했던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 곳곳을 트랜카디스로 장식하며 멈춰있는 건축물에 생동감을 더했다. 구엘 공원에서는 대형 육각 벽돌과 공원 중앙 나투라 벤티, 외벽에 새겨진 공원의 이름에 트랜카디스를 사용했고 공원을 돌아 나오는 여행객들의 머릿속에는 저마다 청색 도마뱀 한 마리가 쓱 새겨진다. 입에서 쉴 새 없이 물줄기가 나오는 도마뱀 분수는 신화 속 정령인 '살라만더'를 표현한 것으로 불꽃 속에 살지만 몸은 얼음처럼 차가워 어떤 고열에도 버틸 수 있다는 환상의 동물이다. 비가 드물어 건조한 바르셀로나에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일종의 심벌 역할인 셈. 이 뜻도 좋고 색도 멋진 동물이 오랫동안 생각났던 이유는 뭘까.   


구엘 공원의 핵인싸, 파란 도마뱀 분수

파괴적 혁신

만든 이 가 8할이다. 브랜드의 DNA는 창립자로부터 나오고 대표의 정체성은 상품과 서비스에 깃든다. 신호와 소음 속에서 제3의 답을 분별하는 것도 대표의 몫이다. 이 '전환점'에서 파괴와 혁신은 거의 동시에 등장하며 이 좁은 구석에 바늘구멍만 한 '레버리지(leverage)' 버튼이 있다.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시리즈로 <혁신기업의 딜레마>를 쓴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경영진과 대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혁신의 실패사례를 집중 조명했다. 최상위 포식자였던 공룡이 기후변화에 대비하지 못해 멸종된 것처럼. 실패한 기업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생각하며 내부의 위협 요소나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지 못했다. 밀폐된 온실 속에서 외부의 온도 변화를 어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반면 과감한 파괴로 혁신의 물결에 올라탄 사례와 프레임워크도 날카롭게 분석 돼 있다. 아, 어려운 이론은 연구자들의 몫으로 두고 우리는 주방으로 넘어가 볼까? 

바르셀로나에서 매일 밥을 지어먹고 세탁기를 돌리던 주방

Special Recipe

준비물  전문분야, 커리어, 관심사, 망치    

만드는 순서

트랜카디스 기법으로 만든 도마뱀을 떠올려본다. 

배움과 경험으로 채색된 과거의 화려한 커리어를 타일이라 생각하고 망치로 깨트려 잘게 조각낸다.  

전문분야, 커리어, 관심사를 섞은 반죽을 뭉쳐 만들고 싶은 모형을 갖춘다. 

조각내둔 타일을 모형의 표면에 이음새 있게 붙여 나간다. 

주의할 점

깨트린 타일 조각은 색감의 연결성과 형태의 골곡에 맞춰 한 조각 한 조각 이어 붙여여야 퀄리티 높은 결과물로 완성된다. 



작품에 깃드는 정신

트랜카디스 기법의 가장 큰 매력은 멈춰있는 조형물에 생동감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가우디표 전매특허인 곡선형 디자인과 자연주의, 지속가능한 작품 철학을 볼 때 트랜카디스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운명이었다. 납작했던 타일이 분수대와 도마뱀으로, 입체형 작품으로 재탄생해 100년 간 살아 숨 쉬고 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도마뱀을 담당한 장인의 솜씨가 성에 차지 않던 가우디가 직접 한 땀 한 땀 이어 붙여 완성한 마스터피스라고 한다. 일에 대한 존엄과 사물을 보는 남다른 관점을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로 연결한 가우디. 그는 레몬처럼 쓴 자신의 삶을 트랜카디스했다. 마르지 않는 샘을 품고 영원을 살고 있는 푸른 도마뱀. 가까이 다가가 타일 조각 틈틈이 깃든 가우디의 세계도 조용히 느껴보았다(너무 느끼다 사진 한 장 못 건짐). 친구를 마중 나온 듯 공원을 찾은 우리 가족을 활기차게 반겨준 이 친구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트랜카디스 기법으로 한 조각 한 조각씩 이어 붙여 만든 가우디의 마스터피스 

전지적 타일시점 

반대로 생각해 볼까. 전지적 타일의 입장에서 가우디는 파괴자요, 트랜카디스는 자신을 죽이는 수단이다. 타일 좌우로 촘촘히 준비된 시나리오가 납작한 타일의 눈에 보일리 없다. 망치를 내리치는 순간, 죽음의 공포와 엄청난 아픔을 경험했으리라. 깨어지고 난 후 비로소 만나게 된 다른 차원의 삶. 평범했던 타일이 수도를 내다보는 수호 도마뱀으로 재탄생돼 눈부시게 빛나는 영원을 선물 받았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위한 최고의 발명품이란 명언을 남긴 스티브 잡스가 떠올랐다. 창업가를 내쫓은 자신의 회사로 복귀하면서 자사의 라인업을 싹 갈아엎어버린 일화는 애플과 잡스를 파괴적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신의 자리가 곧 랜드마크  

한 달 전 커뮤니티에 스페인 여정을 에세이로 전해보겠다! 고 공표했다(왜 그랬을까). 고통 속에 사진을 추리고 메모를 뒤지며 정리해 본 다섯 번째 시간이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기억의 조각들이 콘텐츠로 포장돼 차곡차곡 쌓이니 머리는 가볍고 마음은 상쾌하다. '파괴적 혁신' 구간에 교재로 쓰던 벽돌형 경영서적을 도마뱀 사진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점은 의외의 소득이다. 

살면서 아끼던 것이 망가지거나 무언가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을 경험한다. 애정과 비례,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일도 많이 본다. 바로 그때, 불사의 도마뱀과 트랜카디스를 떠올려보자. 끝이라 생각되는 순간, 시작되는 두 번째 삶에서 목마름 없는 기쁨을 느껴볼 수 있다. 이미 준비된 재료를 충분히 넣으면 같은 것을 하면서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다. 가우디처럼 홀로 틀어박혀 인생 전체를 쏟아 붙지는 말자. 레시피를 만들어 서브하면서 만든 이도 시원하게 마셔가면서 지속가능한 템포를 유지하는 것도 필수다.  

스페인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현실의 삶이 이동함을 느낀다. 최상급 레몬만을 골라 풍성하게 갈아 넣은 진짜 레모네이드를 만들고 있다. 직접 만든 레시피도 공개할 생각이다. 여기저기 같이 만들자는 사람들이 모인다. 

모두 '척' 하는 세상에서 진짜는 귀하다. 당신의 경험을 가치 있게 여겨주는 진국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만들어야 오랫동안 팔면서 이웃을 도울 수 있다. 매일 느리게 산책하면서 당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겨보자. 겁쟁이 타일이 거듭난 바로 그 자리가 랜드마크가 되고 성지가 된다.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느끼며 파이를 키워가자. 혼자서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스스로 존엄하게 일하며 언제든 한 달 살기를 떠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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