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쇠사슬에 대해

'잡년행진' - 슬럿워크(Slut Walk)

by 다른뿌리

'잡년행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이 말이 생소하다면, 다음의 말은 어떤가.


"(여자가) 저렇게 입고 다니니 강간을 당하지"


201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확산된 '슬럿워크(Slut Walk)'는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헤픈 여자(Slut) 같은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는 캐나다 경찰 마이크 생귀네티의 발언이 촉발 지점이었으며, 캐나다 현지 여성들이 일부러 속옷 차림 등 노출이 과도한 옷을 입고 '내 마음대로 입을 권리', '성범죄의 책임은 가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이자 미국, 호주, 영국 등의 주요 도시에서도 비슷한 거리행동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또한 같은 해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을 기점으로 1인 슬럿 시위와 첫 번째 잡년행진이 있었다.


'잡년행진'의 기본 정신은 '옷차림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등 피해 여성에게 가해 남성의 범죄 행동 원인을 뒤집어씌우는 남성 중심 시각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지만, 당시 국내 언론은 여성들의 행진 당일 옷차림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거나 선정적 문구를 전하는 데 급급하며 본질을 흐리는 보도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진보로 '일컬어지는' 몇몇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 2017년 미국에서 헐리우드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저지른 다수의 성폭력 사건이 폭로되며 #metoo 운동이 파장을 일으키자 셀러브리티들의 발언 영향력이 막강한 헐리우드조차도 수십 년 전 피해 사례가 폭로되는 과정에서 2차, 3차 피해가 벌어졌다. 사실 미국의 #metoo 운동은 지난 2006년 이미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제안한 것이었으나 비로소 #withyou 운동으로 번져나가기까지 수년이 걸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실상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지난 2009년 배우 故 장자연 씨가 목숨을 걸고 폭로한 추악한 리스트는 제대로 된 검찰 수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됐으며,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조직 내 성추행 피해와 불평등 인사 보복 폭로에도 가해자인 안태근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에 대한 영장은 허무하게 기각되었다. 검찰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단장 조희진 서울동부지검장)의 '셀프수사'는 야심차게 시작해 우스운 꼴로 구겨졌다. 국내 #metoo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용기를 낸 서지현 검사에게 폭로 목적에 대한 억측과 정치적 음모론, 2차, 3차 피해와 녹록치 않은 불투명한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여성과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수의 범죄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는 생생하게 반복되는 현재진행형 공포이다.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말을 떠올려 본다.


"(여자가) 저렇게 입고 다니니 강간을 당하지"


어느 한 집단에게만 해당되는 말 같은가? 그렇다면 다음의 말들은 어떤가.


"군대 안 갔다 오면 그게 어디 남자인가?", "저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하니 분명 문제가 있겠지", "안낳는 거야, 못낳는 거야?",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게 무슨 고생이라고", "아들 키우는 거에 비하면 딸은 껌이야", "다, 괜찮아. 대머리만 아니면 돼",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


예를 들기 위해 글로 적는 것조차도 홧홧한 말들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 키득키득 웃으며 쉽게 내뱉거나 언제든 주변에 넘쳐나는 끔찍한 소음들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제3의 존재이든 여간해서는 벗어나기 힘든 묵직한 쇠사슬을 달고 태어나 살아가야 하는 일종의 집단 노예 문화라고 하면 너무 심한 자조일까.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무시무시한 시선과 날카로운 혀들이 화살처럼 꽂히는 그런 나라에서 여성권, 동물권,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 존중 같은 주제로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이나 운동을 벌이기에 괜찮은 날들이 언제 올 수 있을지 앞날을 헤아리자니, 그저 말문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