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에게 좋은 인간관계란 어떤 관계일까?
우울증 극복에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좋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다.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좋은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이고, 좋은 인간관계란 어떤 관계를 뜻하는 것일까?
30대 중반쯤었을까,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으면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심리상담사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우울증 극복을 바로 포기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직속상관은 소시오패스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소시오패스가 눈 앞에 있다면 바로 저런 사람일 것이다. 동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돌아서면 경쟁관계로 돌변했다. 회사 분위기는 숨 막혔고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메말라 갔다.
내 인간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이 모양인데 어쩌란 말인가? 지금껏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착실히 살아왔다. 그런데도 아직 이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너무 가혹하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건가. 그게 가능하다면 우울증 환자도 아닐 텐데, 차라리 포기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이랬던 내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몇 년 전에, 하소연을 하고 싶어서 한 지인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나름대로 우울증 극복을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그 모든 일이 무용지물이 된 것만 같았다. 비유하자면 제자리뛰기만 평생 반복하다가 힘이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담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고 무너뜨리기만을 반복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에 비참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나 붙잡고 구질구질한 한풀이를, 구차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말하고 싶었다.
왜 이런 사람으로 살아갈 운명인 건지, 누가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우울한 사람으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막상 지인을 만나고 나니 중요한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주변적인 얘기만 주고받았다. 또, 엉뚱하게도 지인이 갑자기 내게 봉사를 부탁했다. 봉사에 일손이 모자라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고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려고 나와준 사람인데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도와줄 생각이 거의 없었다.
이미 나는 가끔 봉사와 기부를 하고 있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었다. 봉사정신을 알아야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겠지. 이미 할 만큼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더 쥐어 짜내려는 세상이 불공평하다, 고 생각했다.
그렇게 봉사를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그곳에서 우울증 극복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내 기준에 좋은 사람은 이런 사람
아무래도 봉사단체의 사람들인 만큼 구성원들은 대부분 친절한 편이었다. 하지만 우울증 극복에 도움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당시 내 기준에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만한 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개개인의 성격은 천차만별이었다.)
1. 나에 대해 잘 모르고 내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서로의 사생활에 큰 관심이 없다).
2. 비교적 선한 삶을 추구하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다(봉사를 하다 보면 자신에 대한 긍정성이 조금은 생기는 것 같다).
3.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비교적 따뜻하다(일손이 부족한데 본인 때문에 다른 사람이 탈퇴했다는 얘기가 듣고 싶지 않은 듯했다).
4. 생업과 무관한 공동의 목표(봉사)가 있다(상호 간에 유의미하고 공감되는 대화의 소재가 있다).
1번이 결정적으로 좋았다.
청소년기 때 나의 부모님은 나에 대해 자세한 것까지 알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다소 과하게 표현된 것이었는데, 나는 자유로운 걸 선호하는 성향이었던 탓에 이런 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나는 나의 사생활에 터치하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누가 내 사생활에 약간이라도 간섭하는 모습을 보이면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가깝게 지내다가도 거리를 두고는 했다(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봉사단체 사람들은 내 사생활에 대한 조언도, 지적도, 평가도 없이, 내가 하는 말만 나라고 믿는 것이었다. 또,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작은' 호의라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기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도 가혹하게 굴지 않는다.
회사에서라면 분명 화가 났을 법한 일이 그 단체에서도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과정을 몇 년 동안 반복하면서 청소년기 때의 트라우마가 치유됐고 사회에 대한 불신이 희석됐다. 회사 사람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전보다 여유롭게 대할 수 있었고, 그들 가운데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됐다. 또 그들이 보내는 무언의 지지를 통해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오로지 내 생각만 변했을 뿐인데 삶이 바뀌었다.
당시의 나는 회사에서 15시간씩 일했기에 건강이 안 좋았는데, 봉사단체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얻으면서 오히려 건강이 조금씩 회복돼 갔다. 그 이후부터 건강에 전폭적으로 돈을 쏟아부으며 치료를 받았다. 전에는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으니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얘기를 더 하고 싶다
한 가지 얘기를 더 추가적으로 하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살고자 노력했던 나의 생존본능에 대한 얘기다. 지인에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내 얘기를 하려 했던 것. 이제와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구질구질하게 자기 하소연이나 하는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도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무의식이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행동들이 모두 모여서 우울증 치료의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못 나 보여도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을 끊임없이 현명하게 이끌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확신을 가져도 된다. 자기 안에 있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아가 우리 안에는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항상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는지, 성장하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내 경험일 뿐이기에 타인도 똑같은 방법으로 한다고 우울증이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봉사활동마다 성격이 다르고 구성원이 다르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성격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수십 년을 치료해도 극복이 힘든데 감히 내 얘기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도 고쳤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20대 후반에 경계성 인격장애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받은 적이 있고, 심리검사를 하면 내향성 95%, 외향성 5%인 극단적인 히키코모리였다.
나 같은 사람도 살아온 삶인데 그 어느 누구라도 잘 살아낼 수 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더 버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