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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May 16. 2023

내 평생 그리울 순간들은 여행지에 있었다.

이 여행이 허무히 잊혀지기 전에 더듬더듬 흔적을 남겨야만 하는 이유



(in) 암스테르담, 헤이그, 안트베르펜, 겐트, 브뤼셀, 뮌헨, 

잘츠부르크, 체스키, 프라하, 드레스덴, 바르샤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out)


언젠가는 찾아올 내 인생의 봄을 기다리는 심경으로 

그 해 8월 유럽에서의 한 달은... 

온통 아름다움에 멈춘 시간이었다.








이 여행을 다녀온 후, 벌써 몇 번의 계절들이 스쳐간 걸까. 지금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그 기록들을 모아 보려 잊고 지낸 사진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다운 삶을 찾겠다며 대책 없이 방황했던 과거의 한 때 (그렇다. 나는 지금껏 생의 전반에 걸쳐 공허를 품은 채 '나란 사람'을 찾았다), '예술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반짝이던 흔적들이며, '쉼'이나 '관광'이 아닌 여행을 마치 '모험'처럼 여기던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달여 시간 동안 유럽 곳곳을 돌며 매일을 빠짐없이 방문했던 미술관들과 실물을 온 감각으로 마주한 예술 작품들에 대한 아주 길어질지도 모를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그냥 미술관을 돌고 왔나 보네... 하는 무관심의 글일지 모르지만, 시국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여행이 녹록지 않았던 3년의 종식을 이제 막 지나다 보니 더더욱 이국의 공간에서 보낸 그 중독의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여행은 모든 과거의 시간이 담겼던 장소에 감춰진 두꺼운 '시간의 퇴적층'이라는 말처럼, 그 퇴적층의 단면을 나도 오랜만에 펼쳐내며 그때의 시간과 공간의 이동 흐름을 따라 서술하는 기법으로 지난 순간순간의 기록을 시작한다. 마치 그 여행을 다시 떠나는 것처럼 잔잔한 흥분도 인다.   





Prologue 

"예술로 은유하는 빈티지 공간 스타일리스트의 유럽 미술관 탐닉, 

그 서문을 시작합니다."




조금은 서툴고 여전히 분주한 보딩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가다듬는다. 여행을 할 때마다 수십 차례 지속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매번 유사한 듯 다른 소회를 남기며 또 언제나처럼 시간에 쫓긴 채 이 자리에 앉았다. 좋은 상상만 하기로 했다고, 지금부터는 모조리 좋은 인연들뿐일 거라고 수없이 되뇌고 있는 내 모습에서 기분 좋은 긴장감마저 감돈다. 


단순한 여행길은 아니다. 

100일 전쯤 평이했던 여느 봄날, 일상에 자잘한 금이 가고 내 심경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언젠가'라는 모호한 때를 기다리며 그저 눈앞에 닥친 '매너리즘'적인 일을 하고, 앞으로 내게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며(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 매일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말초적인 1차원 자극의 술과 언제나 깊이 없는 그런 대화, 아니 떠듦들. 환멸이 느껴졌다. 실제는 존중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의 무료함을 챙기느라 정신없이 멍한 상태로 끌려다니던 정리되지 않은 삶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 술기운에도 '공허'함이 밀려와 가끔은 흐느꼈으며 다음날 아침의 첫 느낌은 항상 외면하고픈 '후회'. 나름의 투자라 생각했던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과의 관계형성을 위한 나의 노력은 결코 일로 연결되지 않았고, 그 사람들과는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유의미한 연속성이 지속되지 않았다. 얕디 얕은 인맥들과의 무가치한 시간과 감정의 소비, 그렇게 나는 병들어 있었다. 어느덧 익숙하게 황폐함만 남겨졌다.    


조금 더 가치 있게 살고 싶었다. 그 봄날 아침, 여지없이 술기운에 심신이 멍했던 그 보통의 아침에 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형태에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그동안의 사람들과의 관계부터 정리했다. 그리고 명상과 새벽 108배를 다시 시작하고 정말 필요한 만남을 제외하고는 되도록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며 혼자 고요히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노력하며 침잠했다. 지금 당장의 일 이년보다 내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떤 모습으로, 어떤 타이틀로 살고 싶은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의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번 여행은 그 고찰의 과정에 있다. 예술가의 철학을 담은 위대한 작품을 질릴 만큼 감상하며, 내 지난 삶을 돌아보는 밀도 높은 사유의 시간을 통해 '내 생의 위대한 전환'을 욕심내어 맞이하고 싶었다. 철저히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자발적인 외로움을 기꺼이 느끼며 지금껏 타인 같던 나와도 오해 없이 친해지길 갈망했다. 


이제 비행기가 이륙한다. 비행기가 오른 건데, 내가 붕! 하고 뛴다. 속도를 내며 상승하는 게 느껴진다. 이에 맞춰 어김없이 내 귀도 신호를 보내온다. 너는 저 발 밑에서 한참을 올라온 거라고, 그렇게 몸이 내게 신호를 보낸다.




11시간의 오랜 비행 끝에 해지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앉았다. 유럽의 여름해는 내 오래전 기억 그대로 길고 선명하며 수분기 없이 맑고 청량한 음색으로 바삭거린다. 조금만 더 생생하게 그 햇볕의 감각을 기억하고 싶다는 이제 막 일상을 떠나온 자의 무용하지만 여유로운 상념들... 어느덧 하늘은 이제 막 그 도발적인 빛을 거두고 황혼의 저녁을 시작하려나 보다. 노을 물든 서쪽 하늘에 새겨진 비행의 궤적과 루프트한자의 저 키치한 새 마크가 빚어내는 이색적인 주홍빛 풍광이 낯선 땅에 잠시 머물고 있음을 또 한 번 상기시킨다. 아직 더 가야 할 여정이 한참인데 섣불리 스민 감미로움에 공연히 노곤노곤 환각 같은 선잠이 들 것만 같다.       



'한 달 뒤 다시 이 공항에 오게 되겠지? 그때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을까?'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근사해졌음 좋겠다.



허둥지둥 서울 집을 떠나 두 차례의 긴 비행, 매우 흐뭇했던 기내식과 내내 투덜거렸지만 해박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한다는 친구와의 유쾌한 대화들, 그리고 스키폴 공항에서 숙소까지 내게 열렬한 환영의 친절을 베풀어준 197번 버스 기사님(호스텔 주소를 보여주니 심지어 버스에서 내려 너무도 상세히 골목골목 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또 자정이 넘은 시간 그 어둡고 음산했던 암스테르담의 미로 같은 운하 속을 무던히도 잘 찾아온 나. 드디어 체크인을 하고 삐걱거리는 2층 침대에 오른다. 


... 더없이 아늑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첫날, 드디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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