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Apr 30. 2024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게 존재할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유문화사, 2021)을 읽고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p.19)

   어쩌면 이것이 가장 솔직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무섭지 않다. 죽음이란 우주의 먼지에서 탄생한 인간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라는 말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두려워지는 건, 사실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나와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나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 과정이 어떨지를 상상하기란 괴로운 일이다. 누구나 ‘아주 편안한 죽음’을 꿈꾸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아주 편안한 죽음>에서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입원부터 암 진단과 수술, 죽음, 장례식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딸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다.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모른 채 마지막까지 생의 의지를 불태우다 죽음을 맞는다. 보부아르와 그녀의 동생은 어머니를 번갈아 간호하며 그 곁을 지켰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지 않아도 됐었다는 의미에서 보부아르는 어머니가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으며 ‘운이 좋은 자의 죽음’(p.138)이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그녀의 동생은 ‘촛불이 꺼지듯이’(p.127) 돌아가셨다는 의사의 말에 분개하며 이를 전면으로 반박한다. 임종 순간을 목격한 그녀로서는 “죽고 싶지 않구나”(p.126)하고 외치던 어머니의 마지막을 ‘편안한 죽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본인이 어떻게 느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이처럼 같은 죽음을 놓고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결국 보부아르의 말처럼 죽음이라는 ‘합리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일에 직면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건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각자가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풀어 나가야’(p.142) 할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우선 최근에 읽은 욘 포세의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 2019)이 떠오른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중간에 인물의 일평생을 가뿐히 뛰어넘어 탄생과 죽음의 순간만을 그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책에서 요한네스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대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이 죽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침에 깨어나 환시와 비슷한 형태로 삶을 돌아보며 정리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나타나 그의 죽음을 일깨워주고 사후 세계로 안내한다. 요한네스도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단계를 거치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미련 없이 서쪽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이 정도면 ‘편안하다’라고 할 수 있을 죽음 같지만, 이것은 소설이니 허구다. 현실에선 마지막까지 건강하다가 잠들듯이 ‘조용하고 평화롭게’(p.126) 숨을 거둔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혹은 이런 죽음의 방식은 어떨까? 프랑소와 오종 감독에 의해 영화화(<괜찮아, 잘 될 거야>, 2021) 되기도 한 엠마뉘엘 베르나임의 <다 잘된 거야>(작가정신, 2016)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담고 있다. 엠마뉘엘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병실에서 존엄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장녀 엠마뉘엘에게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p.61)라고 말한다. 자녀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였지만, 아버지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다. 엠마뉘엘과 그녀의 여동생은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해 이를 실행에 옮기고 과정에서 사회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엔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스위스로 아버지를 옮기는 데 성공한다. 육체적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겠다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맞는다.      


   이 경우야말로 보부아르의 말처럼 ‘운이 좋은 자의 죽음’에 속한다. 엠마뉘엘의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 작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존엄사를 실행에 옮길만한 재력이 있었고, 법적인 제재(자녀들이 5년 형의 구조의무 위반죄에 해당할 수 있는 상황)를 피할 변호사의 조언도 받았다. 실제로 엠마뉘엘 베르나임의 자전소설은 말기 환자에게 진정제를 투여해 수면 상태에서 숨질 수 있게 하는 ‘안락사’ 법안이 프랑스 하원을 통과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적극적인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다. 우리나라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을 인정하는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고 있다. 안락사와 관련한 논쟁은 점점 뜨거워지는 추세지만, 사회적인 합의에 이르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고 얘기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들이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어떤 내면의 고통을 겪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부아르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마지막에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며 이렇게 마무리한 것을 보면 말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p.153)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을유문화사. 2021)




*이미지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