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영화 <사울의 아들> 교차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너무 많아서 오히려 유대계의 권력과 자본의 힘에 반감이 생길 정도다. 특히 과거의 피해자였던 이들이 가해자 위치에 선 채 이를 정당화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뤄두고,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서 재현의 방식에 있어 새로운 시도로 느껴졌던 영화 두 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근 개봉해 예상치 못한 대중적 흥행을 거둔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와 제68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두 영화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시각적 정보는 극도로 차단되어 있거나 불명확하게 처리되고, 청각적 정보는 배경처럼 깔려 있어 관객의 마음을 괴롭히는 형태다. 둘 다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를 그 장소로 하지만, 카메라가 놓인 위치는 상반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종일관 수용소 담장 바깥세상(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집과 정원)을 보여주지만, <사울의 아들>은 그 벽 너머의 수용소 안쪽(가스실, 화장터 등)만을 담는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물을 좇으며 수용소의 처참한 현실은 아웃포커싱해 흐릿하게 처리한다. 화면비도 4:3이라 인물의 얼굴이나 등에 가려 배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두 영화 모두 실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관객이 유추하고 짐작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연출이 관객에게 더 많은 사전지식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재현의 윤리라는 측면에서 감독의 고민이 느껴지는 두 영화는 그러나 주목하는 인물이 다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가해자다. 그는 영화에도 등장하듯 시안화수소산 가스실의 발명자이며 어떻게 하면 소각장을 효율적으로 24시간 가동할 수 있는가를 연구한 사람이다. 반면에 <사울의 아들>의 사울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에서 ‘회색지대’로 분류했던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다. 존더코만도스는 가스실과 화장터를 관리하고 시체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은 유대인 포로로 구성된 특수부대다. 나치에 협력했던, 그러나 결국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제거 대상이었던, 가해자(공범)와 피해자를 넘나드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3~4개월 극도의 공포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죽임을 당했고 곧바로 다음 부대에 의해 소각되었다고 한다.
루돌프와 사울, 두 인물에게서 비슷한 점은 감정을 배제한 채 주어진 일에 성실히 복무한다는 점이다. 루돌프는 타지로 전출된 상태에서도 대규모 수송 작전(‘회스 작전’이라 명명됨)의 아이디어를 내어 아우슈비츠로 돌아오게 된다. 사울은 유대인들의 소지품 분류, 시체 운반, 가스실 청소, 소각한 재 버리기 등 온갖 일에 투입되어 영화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인다. 다만 루돌프는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성과에 열을 올린 것이라면, 사울은 너무나 끔찍한 상황의 연속에서 혼이 나가 버린 상태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후에 이들이 남긴 진술과 증언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루돌프 회스는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지런한 집행자였고 그런 부지런함 덕분에 칭찬받고 진급했다. 결정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 따라서 우리는 책임이 없으며 처벌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존더코만도스였으나 운이 좋아 살아남은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라는 ‘관심 영역(Zone of Interest)’에만 몰두한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이다(그는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을 훌륭한 관리이자 자상한 아버지, 남편으로 묘사해 반성과 성찰이 아예 없음을 드러냈다). 그에게 강제로라도 성찰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현재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모습을 교차편집하고 배우에게 구역질을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사울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각성해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끝까지 저항하는 인물이다. 사울은 가스실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러나 이내 죽임을 당한 남자아이를 목도한 순간,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는다(실제 그의 아들인지 아닌지 영화는 밝히지 않는다). 그다음부터 사울의 ‘관심 영역(Zone of Interest)’은 아들의 장례가 된다. 그는 부검과 화장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의 시체를 빼돌리고 수용소 내의 랍비를 찾아 고군분투한다. 기계처럼 업무를 행하던 사람이 대열을 이탈하고 명령에 불복종한다. 그를 추동하는 열망은 오직 하나, 격식을 갖춘 애도이다.
<사울의 아들>은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존더코만도스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아우슈비츠 역사상 유일한 반란이었고 화장터 3곳을 폭파했으나 곧바로 진압당했으며 약 450명의 반란 참가자가 몰살당했다고 한다. 사울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화장터의 사진을 찍는 건 실제 있었던 일이다. 시체를 소각하는 4장의 사진이 존더코만도스에 의해 촬영되어 치약 튜브에 숨겨진 채 외부로 유출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선 가스실에서 생존한 아이가 남자지만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소녀가 살아있었던 일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소녀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지만, 존더코만도스에게 혼란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루돌프 회스 부부의 사택과 정원, 수영장은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열화상 카메라 화면의 소녀도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사과를 나누어 주었던 실존 인물이다. 루돌프 회스는 독일 패전 이후 도망쳐 일 년 넘게 정원사로 위장한 채 숨어 지내다가 검거되어 사형당했다.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그의 아내 헤트비히는 재판에서 자신은 평범한 주부였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진술했고 80세까지 살았다. 실제 이야기와 사진은 영화의 충격을 넘어선다.
레비가 책에서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의 도덕적 뼈대는 얼마나 강한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유대인의 피해자성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소비되는 건 감독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 회복에의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며, 이는 가자지구를 억압하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되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방관하고 침묵하는 건 공범이나 다름없다.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타인의 생과 사를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바라보는 건 아닌지, 나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저항의 목소리도 애도의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의 모습이 루돌프와 사울, 어떤 인물에 더 가까운지 한 번쯤 돌아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