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Aug 25. 2024

당신은 누구를 변호하시겠습니까?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아쉬가르 파라디, 2011)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하는 전반적인 감상부터 특정 인물, 특정 장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의 서로 다른 의견을 듣다 보면 영화가 훨씬 풍요롭게 다가오죠. 많고 많은 영화 중에서도 특별히 토론이 풍성하게 이어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대표적으로 그런 영화입니다. 이야기 나눌 지점이 넘쳐나서 토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게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조정 법정 장면입니다. 둘은 이민에 관한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별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씨민은 딸 테르메의 교육을 위해 이란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엄마로서 이런 환경에서 키우고 싶진 않죠”라고 씨민은 말하지만, ‘이런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는 질문엔 함구합니다), 나데르는 치매인 아버지를 두고 갈 수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자식 교육이 우선이냐, 부모 공양이 우선이냐 하는 부부의 갈등을 보면 이란의 상황도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벌써 골치가 아픈데요. 그러나 별거와 양육권 다툼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나데르가 아내 대신 집안일을 살피고 아버지를 돌볼 가사도우미 겸 간병인을 구하면서 벌어집니다.      


   종교에 신실한 라지에가 어린 딸과 함께 간병인으로 드나들다가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복잡하고 심각하게 흘러가더니, 결국엔 나데르와 라지에가 맞고소를 하게 되고 기나긴 진실 공방이 펼쳐집니다. 여기에 여러 주변 인물들(나데르의 부인 씨민, 라지에의 남편 호잣, 씨민과 나데르의 딸 테르메, 테르메의 가정교사 등등)이 얽히고 종교와 이란 사회의 보수성까지 접목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나데르는 라지에를 문밖으로 밀칠 때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라지에는 나데르가 밀치는 바람에 넘어졌고 그 충격으로 유산한 것이 맞는 걸까요? 과연 둘 중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고 진실은 무엇일까요? 양쪽 모두 얻은 것 없이 잃은 것만 많은 이 다툼은 진정 화해와 용서에 이를 길이 없었던 걸까요? 영화의 마지막, 지난한 싸움 끝에 다시 법정에 섰을 때, 테르메는 씨민(엄마)과 나데르(아빠) 중 누구를 선택했을까요?      


(왼쪽)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조정 법정 장면, (오른쪽) 라지에와 그녀의 어린 딸


   여러 논제 중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 고민하게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사정에 맞게 선택적 거짓말을 하기에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없어 보이는데요.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변호할 수 있다면, 누구의 편에 서겠습니까?’ 모임에서 저는 라지에의 손을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나데르를 비난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저였어도 살인자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어서 겁을 먹은 채 진실을 숨겼을 것 같고, 상대의 몰아세움에 오기가 생겨 방어적 공세를 펼쳤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데르에게서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건, ‘돈을 주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던 그가 왜 자신은 결백하다는 신념을 꺾고 위로금을 주는 자리에 나왔을까,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합의하고선 라지에에게 코란에 맹세하라는 억지 요구를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는 상대방의 종교를 약점 삼아서라도 이 싸움에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옹졸함 혹은 비겁함으로까지 느껴집니다. 그들이 먼저 종교를 들먹였으니 나도 똑같이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이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요?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 부닥치면 신념이든 신앙이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활용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정의를 울부짖을 때, 사실은 ‘나의 정의’만이 중요하고 그 밖의 정의(타인의 정의, 공동체적 정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도 듭니다. 인간은 최선은커녕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고 자기합리화하는,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나데르를 변호한다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애초에 라지에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변호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마치 ‘당신은 누구의 고통에 공감하는가’를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이자 돌봄 노동자로서 이중의 억압을 받는 라지에의 고통이 제겐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라지에는 임신한 상태에서 어린 딸을 노동 현장에 데리고 가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노동의 범위나 강도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도 감내해야 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나데르가 라지에에게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우며 일당을 주지 않았을 때)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값싸고 해고하기 쉬운 노동자, 가정과 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라지에가 유산을 한 게 나데르와의 몸싸움 이전이든 이후든, 아이를 잃은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위로는커녕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도 안쓰러웠습니다. 그녀는 나데르 앞에서도, 법정 재판관 앞에서도, 심지어 남편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펴지 못하고 울면서 사정합니다. 그녀의 무력함을 보면서 누군가 그녀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정을 알고 있었던 씨민이라도 그녀를 위해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습니다. 힘없는 약자가 기댈 곳은 연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라지에 곁에 서는 한 명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관객에게 해답을 준다면 당신의 영화는 극장에서 간단하게 끝이 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질문을 제기한다면 당신의 영화는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사실 당신의 영화는 관객 각자의 내면에서 지속될 것이다.” 영화를 보게 된다면 한 번쯤 이 질문에 답변을 해보면 어떨까요? 당신은 누구를 변호하시겠습니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짓는 자유,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