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쿄 소나타>(구로사와 기요시, 2009)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거센 비바람이 집안으로 들이친다. 급하게 문을 닫고 걸레질을 하던 메구미가 잠시 멈추더니 다시 문을 활짝 열어 폭풍을 넋 놓고 바라본다. 영화 <도쿄 소나타>의 오프닝 시퀀스는 앞으로 이 평온한 가정에 들이닥칠 위기를 암시하며 인상적으로 막을 연다.
어느 날, 도쿄의 평범한 4인 가족에게 저 폭풍우 같은 사건들이 몰아친다. 경제 불황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실직한 아빠 류헤이, 집에서 강도에게 납치를 당한 엄마 메구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미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중동으로 파견된 형 타카시, 피아노를 반대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려다 무임승차로 잡혀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된 막내 켄지까지. 격정으로 치닫던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형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족이 다시 식탁 앞에 모이면, 이제 그 유명한 영화의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
4개월 뒤 음대부속 중학교 실기 시험장. 켄지가 피아노 앞에 앉아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달빛처럼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연주에 감화된 듯 사람들이 피아노 주위로 몰려들고 이를 바라보는 류헤이와 메구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불행한 일들이 잊힐 만큼 아름다운 엔딩이다. 불현듯 최근에 읽은 김연수 작가의 단편 <수면 위로>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끔찍한 것을 예상했다가 뜻밖에 듣게 된 피아노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어.'
고난을 겪은 이들 가족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희망적인 결말일까?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아름다워도 너무나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켄지의 연주가 끝나고 가족이 다 함께 퇴장하는 장면은 연극적이다. 화면이 암전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청중의 부스럭거리는 뒷정리 소리만 들린다. 마치 무대는 끝났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라는 주문 같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현실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만약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꿈이나 환상 같은 거라면, 이 영화는 처절한 비극이다.
청소부 복장으로 아내를 마주쳐 달아나버린 류헤이는 아마도 차에 치여 죽었을 것이다. 백화점 화장실에서 주운 돈도 돌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강도에게 납치되어 난생처음 일탈을 경험한 메구미도 검은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모른다. 극단적인 상상일지라도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하다. 이미 영화는 좌절감과 패배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인물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는 노하우를 류헤이에게 전수한 쿠로스는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메구미를 납치한 강도도 바다를 향해 긴 바퀴자국을 남긴 채 사라졌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를 외치던 두 사람도 이들과 비슷한 결말을 맞은 건 아니었을까? 뺑소니 사고를 당한 후에 마치 잠에서 깨듯 깨어나는 일은,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환한 빛을 핀 조명처럼 맞으며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일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식탁 앞에 모인 세 가족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하는 일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해석하면 <도쿄 소나타>는 외관만 잔잔한 가족 드라마이지 냉혹한 현실을 그린 잔혹극에 가깝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일본 호러 장르의 대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비관적으로만 바라보기엔 마지막 장면이 안겨준 고양감이 아깝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어쩌면 삶을 다시 시작할 기회는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권위와 거짓으로 포장한 현실에 매몰된 류헤이와 메구미 부부가 놓친 것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켄지의 피아노 연주라는 것을 일깨우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어둠을 밝히는 달빛 같은 한 줄기 희망을, 미래의 가능성을 영화를 본 당신들만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당부가 이 영화의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