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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영화 <땅 아래 사람들>(이반 오스트로초브스키 외, 2023) 리뷰

by 이연미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4년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인 <땅 아래 사람들(Photophobia)>(이반 오스트로호프스키, 파볼 페카르치크 공동연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상의 폭격을 피해 지하로 대피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열두 살 니키와 그의 가족(아빠, 엄마, 여동생)도 벌써 두 달째 하르키우(제2의 도시) 지하철역에서 생활 중이다. 이 지역의 방공호인 듯한 역사(驛舍)엔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엔 자치 경찰도 있다. 새로 도착한 사람은 총을 든 경찰의 온갖 질문(어디 살았고 이웃은 누구였는지 등)에 답변해야 하고 몸수색도 받는다. 통과한 사람은 플랫폼의 한 구역을 배정받는다.


다행히 아직은 전기가 들어오고 물도 끊기지 않았지만, 고달픈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배급 식량은 늘 부족하고 물도 양동이에 받아 씻어야 할 정도로 부족하다. 병들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진료를 보러 온 날은 지하철역에서 방송을 한다. 나이에 비해 왜소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니키도 이날은 진료를 받는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섭취하는 영양은 부족하고 햇빛도 보지 못하니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다.


어른들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인지하고 견디고 있지만, 아이들은 이런 생활이 그저 갑갑하다. 니키는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고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엄마에게 혼난다. 엄마의 지인은 얼마 전 외부로 나갔다가 갑작스러운 폭격에 사망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은 문 닫힌 지하상가와 철로, 지하철 객차 안을 뛰어다니며 논다.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도 보고 노선도를 보며 상상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가상의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왜 기자들은 전쟁 2일 차, 5일 차가 아닌 개전 첫날에만 관심을 가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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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영화가 촬영된 시점이 2022년 4월부터 8개월간이라고 하니, 영화 속에 등장한 이들은 두 달이 아니라 몇 년째 '땅 아래 사람들'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 전쟁에 둔감해진 세상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버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닐까. 언제쯤 이들은 지상으로 올라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때까지 이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전쟁은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군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영화에 담긴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전쟁 중 대부분의 민간인이 겪게 될 일상일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불안한 삶, 고립되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삶, 아이들이 꿈을 잃고 체념을 키우는 걸 지켜보는 삶. 전쟁의 참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에 니키는 이곳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함께 햇빛이 절반쯤 들어오는 곳에 서서 볕을 쬔다.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 한 줌의 햇빛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지하철역에서 울리는 악사의 노랫소리와 서로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들에서 희망을 찾는 건 너무나 방관자적인 입장은 아닐까? 영화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작은 노력일 텐데, 실질적으로 전쟁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전쟁 종식을 내걸고 양국 정상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늦은 감은 잊지만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고통받는 이들이 예전의 일상을 되찾기를 바란다.


땅 아래 사람들1.jpg <땅 아래 사람들(Photophobia)>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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